[신춘문예-시 당선작] 모란 경전-양점순

2024-12-31

모란 경전 양 점 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시 당선소감] “붙잡아 주시고 용기로 등 밀어주신 분들께 감사”

누군가의 등에 기대 자전거를 타고 풀밭을 달립니다. 보랏빛 도라지꽃들이 물결처럼 갈라지자 그 사람은 내 손을 앞으로 끌어당겨 자전거 핸들 위에 올려놓고 페달을 힘차게 밟아주고 사라집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방파제를 달립니다. 나는 바다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페달을 힘껏 밟습니다. 희고 빛나는 커다란 유빙으로 가득 메워진 넓은 바다 달리고 또 달리는 깨고 싶지 않은 새벽녘 황홀함.

당선 통보를 받아 들고 간단한 물음에도 눈물이 먼저 대답하며 혀가 꼬였습니다. 그날은 밥도 물도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부족한 글 환한 세상으로 끌어내 빛을 보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과 농민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어쩌다가 제집에 다니러 오신 그분은 시력 약한 딸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걸 못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게 다 당신이 건네주신 긴 고삐 때문이지요’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면서도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때로는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붙잡아 주시고 용기로 등 밀어주신 그분들께 이 자리 빌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합니다.

저보다 더 기뻐해 주실 사랑하는 분들과 이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25년 1월 1일’ 새로운 기념일이 생겼습니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더욱 튼튼하게 가꾸겠습니다.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심사평] 말·생각 버무리는 솜씨 안정적…전통적 서정성 돋보여

농경 문화적인 소재와 가족 서사를 기반으로 한 시들이 꽤 많았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이전과 다른 지평을 열어 보이는 일에 대체로 소극적이다.

현명한 독자는 익숙한 것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 한 편만을 선택해야 하는 독자의 마음으로 심사위원들은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당선작으로 고른 ‘모란 경전’은 첫 행부터 독자를 끌어당기면서 한 폭의 따스한 풍속화를 그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말과 생각을 버무리는 솜씨는 안정돼 있고 과하게 감정을 노출하지도 않는다. 최대한 전통적인 서정에 가까워지려는 이러한 노력이 요즘 시단에서 보기 드문 것이어서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 대부분이 과거에 기반을 둔 서정이라는 점은 조금 우려스럽다. 능숙한 문장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알고 좋은 시인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주머니에 해바라기 씨앗이나 넣어둬요 당신이 이 땅에서 쓰러지면 해바라기가 자랄 테니’라는 긴 제목의 시는 현실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폭력 속에 ‘아이들’로 상징되는 연약한 생명의 자리를 만들어 사유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다만 거친 비유와 잡다한 인용은 한시바삐 걷어내야 할 것이다.

‘죽음을 다 쓰면 삶을 써도 될까요’는 죽음에 대한 묵직한 탐구가 믿음직스러웠고, ‘요요’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교차하면서 주객전도의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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