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주 52시간제 예외법’ 여유부릴 땐가

2025-03-03

반도체 기업의 투자에 세제 혜택을 강화하는 ‘반도체법 개정안(K칩스법)’이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제외’ 조항은 개정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주 52시간제는 2018년 7월에 도입됐다. 한국의 근로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길었다. 장시간 근무로 인한 비효율을 개선하고, 근로자의 과도한 업무 시간과 노동 강도를 줄임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현행 52시간제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업종에 획일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은 첨단기술기업·서비스업·제조업 등 다양하다. 기업에서 역할에 따라 경영관리직·생산직·연구직으로 근무 형태도 다르다.

예외조항 담은 법 개정안 지연

근로시간 획일 적용은 비현실적

필요할 때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화가로 활동하는 친구는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옮기다 보니 새벽 3시까지 작업했다”고 말했다. 화가는 물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든 신제품을 연구하든 시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본질이 비슷하다. 불확실성에서 출발한다.

반도체 칩 개발은 시제품 개발과 사업화(양산)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언론에 “세계 최초로 제품을 개발했다”고 나오는 것은 시제품 수준을 말한다. 많은 시료 중에 제대로 동작하는 것이 하나만 있어도 시제품은 성공이지만, 사업화는 다르다.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수백번, 수천번 검증해 원인을 찾아야 한다.

보통은 설계 검증, 양산 검증, 출하 검증의 단계를 거친다. 기업에서는 시제품과 사업화 단계가 연구개발에 속한다. 52시간제에선 이 과정이 연속적이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진다. 연구개발의 특성상 창의적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은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특성이 있다. 정부와 국회가 이런 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HBM(고대역폭 메모리)이 좋은 사례다. SK하이닉스는 4년여를 투입해 2013년 12월 HBM1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2010년대 중후반 HBM 설계 조직은 ‘오지’로 불릴 정도로 힘들었다. 삼성이 2015년 말 HBM2를 먼저 양산하면서 SK하이닉스는 큰 압박을 받았다. 사업의 시장 불확실성이 커졌지만, 끝까지 밀고 나간 SK하이닉스는 2022년 11월 오픈 AI의 챗GPT가 나오면서 HBM 시장에서 우위를 잡았다.

SK하이닉스가 HBM3를 엔비디아에 본격적으로 공급한 시점이 2022년 6월이니, 2009년에 시작해 10년 이상 걸려 빛을 본 셈이다. 52시간제 시행 전인 2017년까지는 밤낮으로 일했고, 그 성과를 기반으로 HBM 과제에 전념했기에 마침내 사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연구개발은 시장 예측이 매우 어려운 분야다. 삼성은 지속적인 HBM 개발을 소홀히 하다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이 겪는 어려움과 52시간제는 별개 사안이다. 마찬가지로 SK하이닉스가 잘한 것이 52시간제 적용에 문제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경직된 52시간제가 고착하면서 연구원들의 업무 마인드가 ‘목표 지향적’에서 ‘시간 지향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52시간제 도입 이후에는 시간이 목표가 되면서 특정 시간까지 일하고 멈추게 됐다. 바람직하지 못한 습관이나 관행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연구원의 일을 법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 연구원의 노동시간을 늘리자는 주장이 아니다. 더 일해야 할 때 더 집중해서 일하게 할 수 있도록 연구원들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이야기다. 지금처럼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하는 시간 한계를 풀어줘야 한다. 추가 근무시간은 파격적인 보상을 통해서 연구원들이 성취감과 성공에 대한 보상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자.

핵심 연구원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집중해 일하고, 원할 때 쉰다. 연구원들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했다. 딥시크에서 보듯 중국 기업의 성장세도 매섭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연구원들이 마음껏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한국 기업과 경쟁하는 미국·중국·대만 연구원들은 시간 제약 없이 밤낮없이 연구·개발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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