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세관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을 텐데, 어떻게 폭탄을 숨겨왔나?”(다치가와·立川 재판장) “수건에 싸서 개짐(생리대) 차듯 아래에 차고 상륙했다. 세관원들은 폭탄인지도 모르고 내 불알이 그렇게 큰 줄 알았겠지.”(강우규 의사)
강우규 의사(1855~1920)의 ‘사이토(齋藤) 총독 폭탄 투척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1920년 2월14일 경성지방법원의 풍경이다.
매일신보는 강의사의 농섞인 진술에 “법정에 운집한 100여명의 방청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2월15일자)고 전했다.
■“허리 아프니 편한 의자 달라”
이날 노구를 이끌고 공판에 나선 강우규 의사는 ‘여유와 당당함’, 그 자체였다. “오늘 같이 푹한 날에 무슨 난로를 이렇게 많이 피웠냐. 더워서 안되겠다”는 둥, “외국인들은 왜 안보이냐”는 둥 여유를 부리며 좌석에 앉았다.
강의사는 거침이 없었다. ‘불알론’으로 법정 분위기를 단박에 휘어잡은 것은 단적인 예에 불과했다.
공판이 길어지자 강우규 의사가 “의자에 잠시 앉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다는 사람이라면서 법정에서 잠시 서있는 것을 고통이라고 여길 수 있느냐”고 비아냥댔다. 강 의사는 재판장을 강하게 꾸짖었다.
“칠십이나 된 늙은이가 허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으니까 청한 것인데…편히 높게 앉은 재판장이 편안한 것만 생각하오? 몸을 국가에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별을 못하는 모양이구려…”
65세 노인의 항변에 재판장도 할 말이 잃었는지 편한 의자를 내어주며 얼마동안 쉬게 했다.
재판장은 강의사의 폭탄 투척(1919년 9월2일)으로 37명의 사상자가 난 것을 두고 한소리했다.
“피고의 폭탄에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강의사는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면서 기발한 비유를 던졌다.
“내가 총독에게 준 술을 총독이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었는데 그 사람들이 취했다 치자.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총독이 건넨 술을 마시고 취한 것이다. 나는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을 뿐이다.(사상자들은) 총독 때문에 피해를 입은 셈이다.”
강의사는 이렇게 궤변인듯 아닌듯 한 비유로 재판장을 헷갈리게 했다.
■“춤추고 노래 부르려 했다”
강우규 의사는 “만약 거사에 성공했다면 현장에서 노래와 춤과 함께 만세를 부르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재판장이 “총독을 죽였다면 어떤 노래를 부를 작정이었냐”고 묻자 직접 붓을 들고 써보였다.
“남산의 소나무·잣나무는 쌓인 눈을 견뎌 서있고, 하늘의 해와 달은 검은 구름을 박차고 밝아있다. 십년의 풍파 시험 나의 맺힌 일편단심 가득한…천추에 이름을 전하고 세계의 이목을 경동케 하세, 이천만 동포야! 나를 배워….”(매일신보)
재판장이 또 “총독 한사람을 죽이면 조선이 독립 될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강의사는 분명하게 말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재인·在人)이지만 일이 성사되는 것은 ‘하늘의 뜻’(在天·재천)이다. 난 하늘의 명령에 따라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총독이 극악무도한 죄인이므로 죽이려고 한 것이다.”
■“총독을 잡아오라!”
오후 5시10분 공판이 끝난 뒤 발언권을 얻은 강우규 의사가 또한번 기막힌 논리를 편다.
“이 재판은 천황이 시키는 거냐. 아니면 총독이 시키는 거냐.”
재판장은 무심코 “법률은 천황 폐하의 의지를 받들 뿐이고 재판은 재판소 독립으로 한다”고 대답했다.
강의사가 기다렸다는 듯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면 어찌 나만 신문하며 귀찮게 구는가. 저 죄덩어리인 총독은 왜 잡아 오지 않는가.”
매일신문은 “재판장이 하도 어이가 없어 말대답하지 않고 퇴정했다”고 전했다.
“(재판장이 퇴정하자) 강우규는 흥분하여 의자를 거꾸러뜨리며 날뛰었다.”(매일신문 2월16일자)
오전 10시에 시작된 1차 공판은 7시간이 넘는 공방전 끝에 종료됐다.
■“일본 지배가 재미없다”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남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공부한 선생은 1885년 31살의 나이에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사했다.
선생은 한약방을 열어 의술을 베풀고, 번화가에 잡화점까지 운영하면서 경제적인 부까지 얻었다. 이 무렵 기독교 전도와 교육을 통한 국교회복운동을 위해 함경도 지역을 방문 중이던 이동휘(1873~1935)의 영향을 받았다.
마침내 강 의사는 기독교(장로교)를 믿게 되었고 사립학교(영명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고 일제 탄압이 가중되자 강의사는 두만강 너머 간도의 터우다오거우(頭道溝)로 거처를 옮겼다.
“왜 일한 합병은 왜 싫어하나?”(재판장)
“금수강산 삼천리가 모두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래서 중국으로 갔다.”(강의사)
연해주 등 각지를 돌면서 한의술을 베풀고 기독교 전도에도 힘쓴 강의사는 북만주 지린성(吉林省) 랴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하고 교포마을(신흥동)을 개척 건설했다.(1917) 그 곳에서도 강의사는 광동학교를 설립했다.
■“용서 할 수 없다”
그런 강의사를 의열투쟁의 길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1919년 일어난 3·1만세 의거였다.
강의사도 광동학교 운동장에서 500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운동을 펼쳤다. 강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결성(3월26일)된 노인동맹단의 랴오허현 지부장이 됐다.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구성된 독립 운동 지원 단체였다.
그런데 6월이 되면서 북만주와 연해주에까지 떠돌기 시작한 소문이 있었다.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경질되고 새로운 총독이 부임한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민족자결주의가 고조되어 3·1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등 독립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듯 했다.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민중의 이간책으로 통치체제를 달리 강화했을 따름이었다. 독립의 길은 다시 가물가물 해졌다. 조선은 무늬만 바꾼 새로운 총독이 다스리는 식민지로 회귀할 참이었다.
노인동맹단의 일원으로서 강우규 의사는 비폭력 투쟁으로는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다고 보고 의열 투쟁의 길을 자처했다.
“왜 신임 총독을 죽이려 했나?”(재판장)
“…하세가와 총독이 조선인은 절대 동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사직하고 돌아갔는데, 다시 새로운 총독이 부임한다니…새 총독은…‘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자이며, 또는 만국 공법을 교란시키는 자이며, 민족 자결주의를 멸시 위반하는 자이며 세계 여론을 경멸하는 자다. 그런 자를 용서할 수 있겠나.”(강우규 의사)
■‘9월2일 총독 부임!’
갈 길을 선택한 강의사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6월 말 러시아인에게 50루블을 주고 폭탄 1개를 구입했다.
강의사는 원산항을 거쳐(6월14일) 10년 지기 최자남(1876~1933)의 원산집에 머물다가 8월5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매일신보에 게재되는 신임 총독의 부임 날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마침내 7월5일 도쿄(東京)로 돌아간 하세가와 총독이 결국 사표를 제출했고, 그 뒤를 해군대장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858~1936)가 잇는다는 기사(매일신문 8월11·14일)가 보도됐다.
강의사는 신문에 난 사이토의 얼굴 사진을 똑똑히 기억에 두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사이토의 부임 기사가 마침내 떴다.(매일신보 8월27일)
“사이토 총독 일행이 9월1일 부산에서 1박을 한 뒤 2일 오전 6시 출발해서 오후 4시 이후 경성(서울)에 도착할 예정….”
강의사는 총독 일행이 도착할 남대문 정거장(서울역) 현장을 답사했다.(8월27일)
■폭탄을 투척했지만…
9월2일 오후 4시 무렵 강우규 의사는 현장을 찾았다. 남대문정거장 광장에는 철통같은 경비망 속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강의사는 총독이 나올 귀빈실의 동북쪽 다방(끽다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5시 열차에서 내려 귀빈실에 머문 사이토 총독과 부인(하루코·春子), 비서관(이토 다케히코·伊藤武彦) 등이 마차를 탔다.
“…난 방금 마차에 오른 사람이 총독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폭탄을 꺼내 손수건으로 싸가지고 있다가 안전핀을 뽑은 뒤 힘껏 던졌다.”
강우규 의사는 그 순간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하나님 뜻대로 이뤄주옵소서!”
잠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굉음과 연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총독이 탄 마차는 남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랬다. 강의사가 던진 폭탄은 마차에서 7보 가량 떨어진 곳에 터지고 말았다.
“마차가 다방 쪽에 다다랐을 때 뒤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마차는 멈추지 않고 달려가 관저에 도착했다. 총독은 허리 쪽에 통증이 있다고 했다. 살펴보니 하얀 하복의 오른쪽 허리춤에 구멍이 났고, 찢어진 허리띠 속에서 파편이 나왔다.”(총독 비서관 이토)
이 폭탄 투척으로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 朝日新聞) 경성특파원과 경기도 경찰 등 2명이 죽고 35명이 다쳤다.
■열차뽀이가 범인이라 지목했지만
목적(총독 처단)을 이루지 못한 강의사는 현장에 가만 서 있었다. 굳이 도망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날 잡는 사람은 없었다…어떤 순사와 소년이 나를 주목했지만 잡지 않았다. 난 이들이 조선인인줄 알았다.”(강의사)
그런데 이 소년은 조선인이 아니었다. 남만주 철도회사 경성 관리국 ‘열차 급사’(속칭 뽀이)였던 18살 소년 오노 지로(大野次郞)였다. 오노는 폭탄을 던진 강의사가 가만히 서있자 순사(경찰)에게 “저기 범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순사는 계속 머뭇거렸다. 소년은 잠시후 현장을 빠져나온 강의사를 남대문 근처까지 쫓아갔다. 그곳에서 마주친 다른 순사에게도 “범인을 잡으라”했지만 그 순사 역시 콧방귀를 뀌었다. ‘열차뽀이’가 지목한 강의사의 인상착의를 들어보면 그럴만 했다.
“범인은 흰수염에 푸른 얼굴을 가진 50~60세 가량의 노인인데 두루마기 차림에 오른손에 양산, 왼손에 손수건을 들었소.”
일제 경찰들 조차 60대 노인이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했다는 ‘열차뽀이’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이다.
■강우규 체포한 악질 친일경찰
강우규 의사는 이후 수염에 머리카락까지 깎고 신출귀몰 하다가 거사 보름만인 9월17일 하필이면 조선인 경찰(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김 경부(계장 혹은 주임)에게 체포되었다. 강의사는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아 다시 총독을 죽이려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았다”고 밝혔다.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 조선인 ‘김 경부’라는 인물은 대표적인 악질 친일경찰이었던 김태석(1883~?)이었다. 김태석은 강의사의 거사 때 현장에 나왔다가 ‘전치 1주일의 경상자’로서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자였다. 김태석은 강 의사를 체포한 뒤 혹독한 고문을 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태석은 이후에도 독립투사에 온갖 고문을 가하는 등 악행을 떨친 대가로 일제 말기(1944) 중추원 참의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런 자였으니 해방 후 열린 반민특위에서 역사의 심판을 받은 것은 사필귀정으로 여겨졌다. 김태석은 일본으로 밀항하려다가 붙잡혔다.
법정에 선 김태석은 “난 일제 치하에서 고쓰카이(小使·잔심부름꾼)에 불과했을 뿐” “강우규씨가 종로서에 자수해왔을 뿐 나는 그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는 등 뻔뻔한 거짓말로 일관했다.
김태석은 1949년 5월20일 열린 반민특위 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판결에서 무기징역에 벌금 50만원 재산몰수를 선고됐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재심청구를 통해 감형되었고, 그 조차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 석방됐다. 이후 김태석은 행방불명된다. 아마도 그가 그토록 섬겼던 일본으로 밀항했을 가능성이 짙다. 강우규 의사가 지하에서 통탄할 노릇이었다.
■강우규의 동양평화론
각설하고 김태석에게 체포된 강우규 의사는 결국 사형이 선고된다.
강의사는 함께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3년형을 받은 최자남(1876~1933)을 위해 항소했다. 1920년 4월14일 열린 2심 재판에서 발언기회를 얻은 강의사는 “동양 평화를 깨뜨리는 자이며, 인도주의를 무시하는 자인 신임 총독을 죽이려 했던 것”이라고 재차 밝혔다.
4월26일 항소심(복심)에서 재차 사형 판결을 받은 강우규 의사는 간수들에게 끌려나가면서 “재판장!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한 몸이다. 당신네들은 동양 전체라는 것을 위하여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고함쳤다.
강의사는 4월28일 제출한 상고 이유서에서 한층 정리된 ‘사이토 저격’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사이토의 부임은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와 인도 정리로서 성립된 평화회의를 교란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 조선인 2000만을…어육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사이토는 일본의 역신이요, 조선의 간적이요, 동양의 악마다.”
강의사는 이어 “새 총독은…분쟁을 유일의 능사로 삼아 동양대세를 영원히 보호할 평화의 서광을 무찌르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5월27일 열린 상고심 선고공판에서도 사형이 확정된 강우규 의사는 면회온 아들(중건)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 죽는다고 슬퍼한다면…내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에 한 일이 너무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한이 되는 것은 내가 죽은 후에 조선 청년들의 교육이다…쾌활하고 용감하게 살려는 조선 청년들이 보고 싶다.”
■하늘이 노했다
1920년 5월29일자 동아일보에 심상치않은 기사가 등장한다.
“강의사의 사형이 확정된 27일 경성(서울)에 오후 1시부터 요란한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내리더니 저녁부터는 지름 7푼5리(2.3㎝)나 되는 우박이 떨어졌다. 하늘이 컴컴해져….”
그런데 오후 7시쯤 강우규 의사의 아들 중건이 종로 네거리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주여! 우리 민족도 다른 세계 각국의 민족과 같이 행복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를 올리다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하늘을 두려워 한 탓일까.
일제는 고등법원의 상고 기각(5월27일) 이후 6개월만인 1920년 11월29일 강의사의 사형을 집행했다.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강의사는 이때 짧은 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이 있도다.(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有身無國 豈無感想)”
강의사의 순국은 일제에 엄청난 충격파를 안겼다. 우선 별의별 후일담이 터져나왔다.
예컨대 매일신보 1920년 12월12일자가 6개월여 전이 보도된 동아일보(5월29일) 기사를 뒷받침한다.
“강우규는 하늘이 내린 거룩한 큰 인물이고, 폭탄 투척은 하늘의 명이었는데…사형 선고 후 뜻밖 폭풍우로 경성 시내가 암흑세계가 되어 집행을 겨울철로 연기…사형집행 후인 최근에도 날씨가 험악해졌다. 틀림없이 하늘이 그 거룩한 사람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라….”
그보다 앞선 1920년 9월8일자 매일신문 기사도 의미심장하다. ‘사이토 총독 폭격 후 조선에서 폭탄 대유행’이라는 제목이 심상치 않다.
“강우규 사건이 일어난지 벌써 1년…그 사이 폭탄이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이 조선 팔도에 거의 수십건…저번에 단성사에서 상영된 활동사진(영화)인 ‘세계의 마음’(世界心) 중에 독일 전선에서 폭탄을 던지는 장면이 비칠 때 지난해 강우규의 폭탄 투척 사건을 상상할 수 있었다…폭탄을 일반 암살에 쓴 것은 강우규 시대부터다.”
■어른의 본보기
이러한 에피소드만 낳은 게 아니다. 강우규 의거는 3·1운동 이후 첫번째 의열투쟁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젊은이도 하기 어려운 폭탄투척의거를 65살 노인이 결행했다. 천고에 빛날 어른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선생의 의거 후 의열단(김익상·김상옥·나석주)과 한인애국단(이봉창·윤봉길) 등 20~30대가 의열투쟁의 대열을 이었다. 65살 노인이 식민지 조선의 청·장년 열사들을 피 끓게 만든 것이다.
새삼 “나는 결코 와석종신(臥席終身·제 명에 편안히 자리에 누워 죽음)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는 강의사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제 6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늙은이 대접 해달라고 떼쓰면서 젊은이들에게 누만 끼쳐서는 안될 일이다. 며칠전 강의사의 순국일(11월29일)을 그냥 보냈다. 역사의 현장에 서있는 선생의 동상에라도 한번 들러봐야겠다.(이 기사를 위해 박환 수원대 명예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박환, ‘강우규의 의열투쟁과 독립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5권55호,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8
박환, <강우규의사 평전-잊혀진 의열투쟁의 전설>, 선인, 2010
정운현, <노구를 민족제단에 바친 의열투쟁가 강우규>, 역사공간, 2010
김창수, ‘일우 강우규 의사의 사상과 항일의열투장’, <이화사학연구> 30권, 이화사학연구소, 2003
독립운동사편찬위,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