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골프 세계 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의 이 한마디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북아일랜드에서 열린 제153회 디 오픈 챔피언십을 앞둔 기자회견장에서 나온 그의 발언은 스포츠계 전반에 충격을 안겼다. 그는 골프가 가족과의 삶을 해친다고 느껴지는 날이 온다면 “그날이 골프를 그만두는 날”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 셰플러는 다시 우승했다. 최근 3년 사이 네 번째 메이저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골프는 내게 큰 기쁨이지만, 그 성공이 내 영혼 깊은 곳을 채워주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글로벌 스포츠 전문 매체 디애슬레틱은 “세계 정상에 오른 선수가 느끼는 허무감. 셰플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챔피언들의 여러차기 사연을 최근 전했다.
미국 NFL 스타 아론 로저스는 슈퍼볼 우승 후 “이제 뭘 해야 하지? 내가 정말 원했던 게 이거였나?”라고 자문했다. 복싱 세계 챔피언 타이슨 퓨리는 “무지개 끝에는 황금 항아리가 없었다”고 썼다. 마이클 펠프스는 올림픽이 끝날 때마다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이는 스포츠계에서 잘 알려진 심리 현상, 이른바 ‘포스트-성취 우울(post-achievement depression)’이다. 심리치료사 게리 블룸은 “20대 초반에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경험한 이들이 그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라며 “자신을 ‘세계 1위’라는 성과로 정의한 이들이 그 타이틀이 사라졌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했다.
셰플러의 고백은 또 다른 중요한 심리적 통찰을 던진다. 바로 결과(goal)와 목적(purpose)의 혼동이다. 심리 퍼포먼스 전문가 자밀 쿠레시는 대부분의 운동선수가 “이기고 싶다”, “1등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마치 인생의 목적처럼 여긴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목표는 성취되는 순간 끝난다. 그 직후엔 허무함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진정한 목적은 실현 가능한 방향이 아닌, 지속적으로 추구되는 삶의 기준이어야 한다. 쿠레시는 “행복은 자신보다 더 큰 목적에 몰입할 때 찾아온다”고 설명한다. 트라이애슬론 챔피언 앨리스터 브라운리는 “5분짜리 시상식은 수년간 고통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결국엔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셰플러는 골프를 인생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2022년 마스터스 우승 직후 “나의 정체성은 골프 성적이 아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골퍼 이전에 ‘신앙인’, ‘남편’, ‘아버지’라고 정의한다. 게리 블룸은 이를 ‘정체성의 분리와 통합’이라고 설명한다. 블룸은 “‘내가 곧 경기력’이라고 생각하는 선수는 경기 성적에 따라 자아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며 “하지만 셰플러처럼 다층적 정체성을 지닌 선수는 경기 결과와 무관하게 자기 효능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쿠레시는 “감정의 안정성이 경기력의 일관성을 만들어낸다”며 “셰플러처럼 ‘삶’이라는 더 큰 틀에서 스포츠를 바라보는 선수일수록 압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쿠레시는 “셰플러는 과거보다 훨씬 성숙한 시선으로 골프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앞으로 은퇴를 결정하든, 더 오래 뛰든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자기결정이론의 핵심, 즉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의 균형 속에서 동기와 행복이 자라난다는 원리와도 일치한다. 디애슬레틱은 “셰플러의 발언 중 중요한 것은 ‘내가 세계 1위’라는 게 아니라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다’라는 말”이라며 “셰플러는 그것을 보여주는, 매우 인간적인 챔피언”이라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