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외선 불판’으로 유명세를 타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자이글. 이 기업을 감사한 회계법인은 적자 누적으로 기업이 계속해서 운영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며 2024년 감사보고서에 ‘계속기업 관련 중대한 불확실성(계속기업 불확실성)’ 이라고 적시했다. 이는 투자자들의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정보여서 사업보고서 본문에 기재해야 하지만, 기업이 공시한 사업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2629개 상장사 전수조사 결과, 9개사 부실 공시
정부가 한국 증시 부양을 위해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에 집중하고 있지만, 주식 투자의 기본이 되는 사업보고서 공시조차 정확성과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사례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27일 중앙일보가 국내 상장기업 2629곳의 2024 회계연도 사업보고서를 전수조사한 결과, 코스닥 상장사 9곳이 계속기업 불확실성 여부를 사업보고서 본문에 공시하지 않았거나, 잘못된 내용으로 공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융감독원의 기업공시 서식작성기준에 따르면 비적정 감사의견을 받은 상장사는 사업보고서 본문(Ⅴ. 회계감사인의 감사의견 등)에 관련 지적사항과 재무제표에 미치는 영향을 요약해 기재해야 한다. ‘적정’ 감사의견을 받았더라도 ‘계속기업 불확실성’을 지적받았을 경우 사업보고서에 기재해야 한다.

이 같은 부실 공시는 자칫 투자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코스피 상장사 롯데관광개발은 2023년 4월 계속기업 불확실성 내용을 사업보고서에 누락해 개인투자자들이 큰 혼란을 겪었다. 당시 주식토론방에선 “감사보고서에 부실 신호가 떴으니 주식을 팔아야 한다”, “아니다. 사업보고서엔 (계속기업 불확실성)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하니 지금이 들어갈 타이밍”이라며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중앙일보 조사 결과 윈팩·TS트릴리온·리더스코스메틱·대한광통신 등 4곳은 감사보고서 강조사항에 ‘계속기업 불확실성’이 적시됐지만, 사업보고서 본문의 관련 항목엔 ‘해당사항 없음’으로 기재했다. 자이글·엑스플러스·하이퍼코퍼레이션·메디콕스·세종메디칼 등 5곳은 관련 항목을 채우지 않고 공란으로 표시했다.

‘계속기업 불확실’ 기업, 상폐 확률 14배 높아
금감원이 2022 회계연도를 기준으로 추적 분석한 결과 감사의견으로 적정을 받았더라도 계속기업 불확실성이 지적된 상장사는 상장폐지되거나 비적정 감사의견을 받을 확률(25.9%)이 지적받지 않은 기업(1.8%)보다 14배 이상 높았다. 이 때문에 금감원은 매년 관련 사항이 사업보고서 누락되지 않았는지 점검한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사업보고서등 중요사항에 거짓 기재, 또는 중요사항이 기재되지 않은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시행령에 증권 발행 제한, 임원 해임권고, 수사기관 통보 등 구체적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기재 누락의 경우 고의성을 바로 확인하기 어렵고 감사보고서에는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 만큼 자진 정정하는 수준에서 유도하고 있다”며 “매년 공시 역량을 높이기 위해 설명회를 열지만 미흡한 사례가 계속 나온다”고 말했다.
“고의 부실 공시 기업부터 먼저 회계감리해야”
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이 사업보고서 부실 공시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계속기업 불확실성’처럼 기업에 불리한 내용을 사업보고서에 상습적, 고의적으로 부실하게 공시한 기업은 최우선으로 회계감리(분식회계 조사) 대상에 선정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