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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한국에 온 이시가미 코나츠(29)는 서울 강남의 한 일본 음식점에서 홀 서빙을 한다. 그는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었는데, 문화·사회적으로 친숙하고 분위기가 ‘힙’한 한국을 택했다”고 했다. 숭실대에 재학 중인 유학생 아라마치 루나(27)는 국내 기업 제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번다. “도쿄 정도를 제외하면 오히려 한국의 급여 수준이 더 높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들처럼 요즘 한국 기업이나 음식점·옷가게 등에서 일하는 일본 청년들이 눈에 띈다. 이들에게 머물 곳과 일본어 과외를 알선하는 사업이 등장할 정도다. 실제 최근 통계(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통계월보)를 보면, 장기체류자격 비자를 받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2020년말 2만2695명에서 지난해 말 2만9778명으로 31.2% 늘어나는 등 꾸준한 증가세다. 무비자로 입국해 단기 일자리를 얻은 사례까지 고려하면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인당 GDP·임금 역전했다지만
경제 ‘피크 코리아’ 신호 뚜렷
‘친기업’ 정책 아일랜드 본받아야
물론 한국의 일자리 여건이나 국가 매력도가 일본을 앞섰다고 보진 않는다. 절대적인 수치는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더 많고, 일본은 여전히 우리가 배워야 할 게 많은 선진국이다. 다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서 일본으로의 구직행렬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당시 한국인 청년들이 일본 공항에서 불법 취업 입국자로 의심받으며 수모를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K팝·K드라마 등 이른바 K콘텐트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문화·사회·언어적 유사성이 많으며, 최근 한일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점 등이 배경으로 꼽힌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작용한 건 높아진 한국의 경제력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2년 4만9175 달러에서 2023년 3만3899 달러로 뒷걸음질 쳤다.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 2만6600 달러에서 3만5563 달러로 계속 상승세다. 2000년 3배 이상 차이가 났지만, 이젠 한국이 일본을 앞선다. 중앙일보 취재진과 인터뷰한 국내 취업 일본인들도 “격차가 벌어졌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경제·정보기술(IT) 수준 등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 엔저(円低)로 상대적 임금도 한국이 두둑해졌다. 원화로 환산한 직장인의 월평균 임금(2022년 기준. 한국경영자총협회 자료)은 한국이 399만원으로 일본(379만원)보다 많다. 일본 기업이 슬럼프에 빠진 동안 한국 기업이 진격을 거듭한 결과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흐름이 이어질지는 물음표다. 경제가 정점을 찍고 내리막에 접어들었다는 ‘피크 코리아’ 신호가 선명해져서다. 지난해 2~4분기 성장률(전 분기 대비)은 -0.2%·0.1%·0.1%로 사실상 3분기 연속 제자리걸음이다. 기존 주력 품목의 수출 성장성은 한계에 이르렀고, 첨단 IT 패권경쟁에도 점차 밀려나고 있다. 여기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내수를 떠받쳤던 인구까지 감소세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가 상경계열 교수 111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피크 코리아 주장에 3분의 2가 동의한다고 했다. 이들은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절벽(41.8%) ▶신성장동력 부재(34.5%)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낮은 노동생산성(10.8%)을 위협 요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기업 설비투자 지원 및 연구개발 촉진(34.3%) ▶규제 개선(22.8%) ▶신산업 이해 갈등 해소(13.8%) ▶노동시장 유연화(12.6%) 등을 정부에 제안했다. 쉽게 말해 기업이 신나게 투자하고 경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라는 건데, 이미 많은 전문가가 내린 처방과 결이 같다. 반시장·친노조 이념에 빠져, 기업의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기 바쁜 일부 정치인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웃 나라에 식민지배를 당한 불우한 역사를 공유하는 아일랜드의 성공 사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80년만 해도 영국의 60%에 불과했지만, 2023년 기준 아일랜드의 1인당 GDP는 영국의 2배가 넘는 10만3465 달러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나라다.
친기업 정책을 기반으로 한 세계 최저 수준의 법인세율,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규제·조세 환경, 1987년 ‘사회연대협약(Social Partnership)’ 이후 이어진 노동시장 안정 등이 배경으로 꼽힌다. 덕분에 아일랜드는 세계 굴지의 테크·금융·제약회사의 유럽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했다. 과거 아일랜드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떠났지만, 이젠 영국을 포함해 유럽의 우수한 두뇌들이 아일랜드로 몰린다. 결국 기업 친화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경제 성장, 인재 유치의 지름길임을 아일랜드 사례는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