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배우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라는 드라마로 ‘2024 MBC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이 열렸던 날은 지난 12월30일. 바로 전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생방송이 취소되었고, 미룰 수 없는 시상식은 녹화되어 1월5일에 방송되었다. 항상 시상식을 채우던 축하와 감사의 언어는 안타까움과 송구함이 대신했다. 가장 큰 축하를 받아 마땅할 대상 시상 자리, 한석규 배우는 “송구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고는 끝내 수상 소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축하의 자리에서 송구함을 말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바라보며 내가 감히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느낀 이유는 나 역시 위로의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인 기억들이 많기 때문이다.
황망한 참사 앞에서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당연한 인사조차 염치없게 느껴진다. 올 한 해 무탈하게 보내자는 그 평범한 안부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신년 인사가 전처럼 자연스럽지 않다. 축복과 환희의 말들은 변주와 변형을 거쳐도 결국 복을 나누지만, 위로의 말들은 자칫 잘못 다루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많다. 더 정교하고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언어를 고르다 아무 말도 못하고 지나가거나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자고 너무 많은 말을 하다 그르치는 경우도 잦다.
절망 속에서 달력을 넘기고 맞이한 새해, 올해는 축복의 말보다 위로의 말을 더 많이 고민하고 싶다. 여전히 사회는 어수선하고, 지구 곳곳에선 생명을 앗아간 소식이 전해져 온다. 축복과 사랑을 가득 담아 한 해를 시작하고 싶은데, 슬프게도 위로를 나눌 일이 자꾸 늘어나고 그 상황에 건넬 최신의 말은 늘 궁하다. 애썼어, 네 탓이 아니야, 내가 밥 한 번 살게, 무엇이든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 아는 말을 다 꺼내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충분하게 위로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슬픔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까 고민해도 상황이, 사람이, 관계가 달라서 매번 처음 보는 문제를 만난 것처럼 위로의 언어를 고민한다. 모든 상황에서 정답이 되어주는, 모든 비애와 절망을 한 번에 잠재울 수 있는 마스터키 같은 말은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좋은 위로를 위해 우리가 먼저 성찰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서현진 배우가 한석규 배우와 같은 작품을 할 때 배운 연기 방식을 설명했다.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보고, 듣고, 말하기”라고 조용히 외치고 연기를 시작한다고 한다. 연기를 잘하는 법은 상대방을 잘 보고,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내 말을 하는 것이 전부라고. 신기하게도 이 말은 좋은 위로의 방식에도 적용이 된다. 중요한 건 위로를 전하고 싶은 나 자신의 밀도를 낮추고 상대를 더 많이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태도. 좋은 위로는 말하기 전에 상대를 더 오래 바라보고 더 많이 듣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어렵고도 값진 일 중 하나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일. 위로의 언어를 고민하고 배운다는 건 이 세계에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이다. 그러니 나쁜 날들이 종종 찾아와도, 그에 맞서 우리를 위로할 더 나은 언어를 고민해보자.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이 행복은 아닐지라도, 그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회복의 시간이 되어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