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중동의 '소버린 AI' 열기

2025-10-12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Winter is coming).”

경제의 냉기가 짙어지면, 세계 경제 전문가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지금의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미국이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강화하며 철강·배터리 등 주요 산업에 대한 관세 부활에 나서고 있고,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은 여전히 거세다. 여기에 우방 중심의 공급망 재편, 고금리와 환율 불안이 겹치며 수출 둔화와 내수 위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기자가 중동 출장길에서 마주한 온도는 전혀 달랐다. 사막의 뜨거운 바람 속에서 느낀 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의 열기'였다. 사우디와 UAE에서 만난 사람들은 '경제 위기 대응'보다 '새로운 질서의 설계'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AI)이 있었다.

특히 이들 정부와 주요 투자기관이 자주 언급한 단어는 '소버린 AI(Sovereign AI)'였다. 사우디는 '비전 2030(Vision 2030)' 국가 미래전략의 핵심에 AI를 두고, 자국 데이터와 인프라를 기반으로 주권형 AI 생태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수백조 원에 달하는 자본을 투입해 초거대 데이터센터와 AI 팩토리를 세우고, 전 세계 AI 인재를 불러들이고 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한 나라가 한국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구글에 점유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네이버·카카오·쿠팡 등 토종 플랫폼이 지탱하는 한국의 디지털 자립 생태계는 사우디가 지향하는 소버린 AI의 이상적 모델로 비쳤다. 데이터 주권과 기술 독립의 경험이 사우디의 미래 전략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개방적 비전 아래 사우디는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미 국내 한 생성형 AI 기업이 사우디 정부가 주도하는 AI 플랫폼 프로젝트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

글로벌 기술의 중심축도 이동하고 있다. 사우디 테크 박람회 'LEAP'에는 글로벌 기업들이 몰렸고, 한국 기업들도 역대 최대 규모로 참가해 기술력을 선보였다. 이달 열리는 글로벌 혁신 포럼 'FII(Future Investment Initiative)'에는 AI반도체 기업 '리벨리온'이 세계 5대 스타트업에 꼽혀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피칭에 나선다. '사막의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FII 무대에 한국 스타트업이 오른다는 것은, 우리 기술의 위상이 이미 글로벌 AI 질서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미국 CES가 비자 문제 등으로 열기가 식은 사이, 세계 기업들의 시선은 '중동의 CES'로 불리는 두바이 '자이텍스(GITEX)'로 향하고 있다. 올해 행사에 우리 정부도 역대 최대 규모로 지원에 나섰다. 실리콘밸리 중심이던 기술의 축이 이제 중동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 같은 흐름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이 리쇼어링, 유럽이 프렌드쇼어링을 내세워 산업 재편을 가속화하는 동안, 중동은 세계 기술의 중립지대이자 새로운 공급망의 교차로로 부상했다.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AI·로보틱스·스마트시티 등 미래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이들은 한국을 전략적 기술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경제는 분명 녹록치 않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방향을 바꾸라는 신호다. 중동 국가들이 그리는 소버린 AI의 퍼즐을 완성할 핵심 조각은 한국일 수 있다. 기업은 물론 정부가 함께 움직일 때, 사막의 열기는 곧 우리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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