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주주 우군 ‘집중투표제’···태풍일까. 미풍일까

2025-01-30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재벌개혁의 상징인 집중투표제가 최근 한 기업의 경영권 분쟁에서 등장했다. 고려아연은 이달 중순 임시 주주총회에서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 일부 변경의 건’을 의결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 가족 회사인 유미개발이 대주주인 MBK파트너스의 이사회 장악을 막으려는 의도로 집중투표제를 제안한 것이다. 경영 투명성을 높이자는 취지로 도입된지 17년이 된 집중투표제는 재계가 해외 투기세력에 악용된다며 반발하고 있어 유명무실한 상태다.

집중투표제는 회사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식 1주당 선임할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주주는 부여받은 의결권을 1명 혹은 여러 명에게 집중적으로 몰아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총에서 선임할 이사의 수가 3명이라면 100주의 주식을 가진 주주는 300주의 의결권을 가진다. 주주는 300표를 특정 후보 1명에게 몰아주거나 여러 명의 후보에게 분산해 투표할 수 있다. 소수주주 측이 추천한 이사가 선임될 가능성이 커진 만큼 집중투표제는 소수주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대표적인 장치로 꼽힌다.

한국은 1998년 상법 개정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도입했지만 실제 운용하는 사례는 드물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기준, 공시대상기업집단 중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회사는 전체 상장사(344개사) 중 3.8%(13개사)에 그쳤다. 이 가운데 지난해 집중투표제 방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한 회사는 KT&G 한 곳으로 전체 상장사 중 0.3%에 불과했다. 지난해 3월 KT&G 주총에서는 행동주의펀드 등이 청구한 통합 집중투표제를 적용해 사모펀드 등이 지지한 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기업은 왜 이렇게 드물까. 회사는 집중투표제를 정관에서 제외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투표제 도입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여기에 집중투표제를 청구하기 위해서는 3% 이상의 지분율 요건도 충족해야 한다. 자산이 2조원이 넘는 상장회사는 주주가 지분을 1% 넘게 보유하면 집중투표제를 청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문턱은 높다.

집중투표제가 사실상 유명무실함에 따라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입법 시도는 그동안 꾸준히 이어져 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2016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시절 집중투표제 도입이 담긴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난해 11월 민주당도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회사는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 배제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내놨다.

재계에서는 그러나 해외 투기세력이 악용할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는 집중투표제에 이사를 뽑을 때 감사 위원 전부를 따로 분리해 선출할 경우, 30대 기업 중 8개사의 이사회가 외국기관 연합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재계의 우려가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개혁연대가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 150개를 분석한 결과, 더불어민주당 당론인 감사위원 2명 분리선출을 적용하면 집중투표제를 통한 이사 선임 가능성은 45%였다. 집중투표제를 통해 이사회에 진출한 이사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가능성은 4%에 그쳤다.

경제개혁연대는 “외국인 주주 중에서는 특수관계인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전략적 제휴 등으로 사실상 지배주주 측인 경우가 있다”며 “한경협 자료는 지배주주 측과 의결권 대결을 벌일 외국인 측의 지분율이 합리적으로 추정됐는지 검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 집중투표제가 소수주주 측에 항상 유리한 건 아니다. 2023년 KT&G 주총의 경우 사모펀드 측에서 4명의 사외이사를 추천했지만 집중투표제를 적용했는데도 다른 주주의 지지를 받지 못해 이사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광범위한 사각지대는 여전히 남을 전망이다. 민주당 안은 대상이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인 만큼 전체 약 2400여개 상장회사 중에서 자산 2조원 미만의 2200개 상장사는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2조원 미만 상장회사에 대해서는 최소한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 배제하거나 배제된 정관을 변경하려는 경우, 주총에서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규정을 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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