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달째 미국으로 수출 0"…중소∙중견기업 죽어난다 [관세후폭풍]

2025-10-12

“지난 6월 이후 미국으로 수출이 ‘제로(0)’예요. 수주를 못하니 부두 창고에 20억원어치(제품)가 묶여 있습니다. 눈앞이 캄캄합니다.”

미국으로 산업용 볼트·너트 등을 수출하는 중견기업 신진화스너공업의 정한성 대표는 트럼프발(發) 관세 폭탄이 본격화된 이후 대미 수출이 전면 중단됐다고 말했다. 상호관세(25%)는 8월부터 발효됐지만 이 회사의 수출 길은 두 달 먼저 끊겼다. 철강 관세가 3월부터 25%, 6월부턴 50%씩 부과되면서 미국 바이어들이 주문을 줄줄이 중단한 영향이다. 창고 보관 비용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막막하다. 정 대표는 “미국 이외 지역으로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중국산이 이미 장악한 곳으로 수출을 다변화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엘리베이터 제조사인 중소기업 A사는 관세 부담으로 휘청이고 있다. 엘리베이터 부품 대부분이 철강이다 보니 3월부터 관세 영향권에 놓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미국쪽 수입업체가 관세를 이유로 물건을 돌려보내거나, 계약 내용과 달리 ‘관세를 대신 내라’는 요구가 많은데 중소기업이다보니 대응할 전문 인력도 없다”고 말했다.

미국발 상호관세 여파에도 올 9월 한국 수출이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지만, 중소·중견 기업들의 체감 현실은 다소 다르다. 고무줄 관세에, 불리한 계약 구조, 인력·정보력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이들을 더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12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대미 수출기업 상담 센터인 ‘KOTRA 관세 대응 119’에 지난 2월 18일부터 지난달 19일까지 약 7개월간 접수된 상담 건수는 총 7722건이다. 대부분 중소·중견기업으로, 관세 확인(5383건) 상담뿐 아니라 대체시장 발굴(464건)이나 생산거점 이전(254건) 관련 상담도 많았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가별 상호관세를 확정 발표한 직후인 4월 2주차(801건), 상호관세 유예 기간이 끝난 8월 초(366건)에 상담이 몰렸다. 미국의 기습적이고 오락가락하는 발표에 기업들의 혼란이 컸다는 의미다.

가장 큰 걸림돌은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통관·규제 리스크다. 예컨대 미국은 철강·알루미늄·구리 등에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50%의 품목별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기준액 산정 방식이 불분명하다. 장고은 관세사는 “원가 기준이냐, 노무비·가공비 등을 가산한 평가 기준이냐에 따라 관세액이 크게 달라지는데,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에서도 뚜렷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일선 현장에선 천문학적인 관세를 날벼락처럼 얻어맞는 경우가 속출했다. 식품 수출업체 B사는 미국 세관 통관 과정에서 제품 포장용기에 들어간 알루미늄 성분에 대해 200%의 관세를 적용 받았다. 이전처럼 신고했지만, CBP는 알루미늄 원산지가 제대로 증명되지 않았다며 ‘러시아산’으로 간주하고 징벌적 관세까지 추가 부과했다. 또 4월 초 항공편으로 제품을 보낸 기계류 수출업체 C사는 하루 차이로 10%가 아닌 25% 관세를 맞았다. 이로 인한 손실만 수만 달러 규모다. 구리 제품을 수출하는 한 중소기업 대표는“원래 관세 0%로 미국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50%로 올라 타격이 크다”며 “미국이 주요 수출국인데, 이대로 계속 사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관세가 거의 없던 시절 맺은 계약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본선인도조건(FOB) 계약은 현지 수입업체가 관세를 부담하는 반면, 관세지급인도조건(DDP) 계약은 한국의 수출업체가 관세를 내야 한다. 업계에 따르면 아마존 등 미국 이커머스 업체를 거쳐 한국산 제품이 미국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경우엔 DDP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FTA가 유효할 땐 대부분 관세가 ‘0%’라 부담이 없었지만, 이젠 수출업체들이 관세 부담을 고스란히 지고 있다.

여기에 중소기업들은 대기업보다 인력이나 정보력이 부족해 더 힘들다. 수출용 샴푸바를 만드는 한 뷰티 스타트업 대표는 “수출하려면 상표등록부터 위생허가, 영어·중국어·일본어 콘텐트 제작까지 혼자 다 해야 하고, 각국의 핵심 유통 채널에 입점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전 세계에 주재하는 KOTRA 무역관 관장 1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미국 상호관세로 인해 중소·중견기업(68.6%)이 대기업(31.4%)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지역의 한 무역관장은 “중소기업은 매출 대비 원가율이 높고 가격 경쟁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보니 관세에 특히 취약하다”고 밝혔다.

이에 공급망 다변화와 대체 시장 발굴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액은 전년 대비 12.7% 증가한 659억5000만 달러롤 기록하면서 3년 6개월 만에 최대 기록을 경신했는데, 대기업 자동차 제조사 등이 유럽으로 수출 다변화에 성공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중소·중견기업은 상황이 다르다. 단기간에 현지 품질인증이나 유통망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우선은 ‘버티기’와 ‘실무 대응’으로 파고를 넘고, 장기적으로 공급망을 재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금하 KOTRA 북미지역본부장은 “미국의 관세 정책이 바뀔 때를 대비해 기업별로 가능한 범위에서 부품 공급망을 조절하고 케파(생산능력)를 미세조정하며 일단은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권지원 관세사는 “미국의 관세 면제 규정을 잘 파악해 부품 조달 비율을 조정하거나, 가능하다면 일부라도 미국에서 생산해야 한다”며 “특히 미국 CBP에 관세 사전유권해석(Binding Ruling)을 신청해 관세 부담을 미리 예측하는 것도 필수”라고 조언했다.

한·미 정부 간 협의가 길어지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도 필요하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정책연구실장은 “중소·중견기업은 단독으로 공급망을 다변화하기 어려운 만큼 현지 시장조사 지원, 수출 바우처 확대 등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KOTRA 등 민간 지원 기관 간 유기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도 “관세 피해 기업에 저리로 융자, 긴급자금 등을 신속히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