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정개혁 갈림길에 서있다…"세계를 보면 길이 보인다"[재정중독, 벌어진 악어의 입]

2025-10-08

“조기 합의·점진 개혁으로 지속가능한 재정 지킬 수 있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려면 ‘조기 합의·점진 개혁’이 답이다. 복지를 줄이지 않고 재정을 지킬 수 있는 것인가? 1990년대 초반,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스웨덴이 불과 10여년 만에 북유럽 모델로 불리는 안정적 복지국가로 탈바꿈한 배경에는 조기 개혁과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반면 같은 시기 복지 지출을 늘리며 구조개혁을 미룬 프랑스는 결국 뒤늦은 개혁 시도에 폭발적 반발과 정치 혼란을 겪었다. 지금 한국은 두 나라의 교차로에 서 있다. 재정 건전성 악화 속에서도 복지·연금 개편은 정치적 부담 탓에 번번이 미뤄지고 있다. 과연 한국은 스웨덴식 지속가능 개혁으로 갈 것인가, 프랑스식 혼란을 답습할 것인가 갈림길에 서있다.

■스웨덴, 조기 합의로 위기 극복…“복지 줄이지 않고 재정 지켰다”

1990년대 초 스웨덴은 은행 부실과 부동산 거품 붕괴로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GDP 대비 재정적자는 12%, 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하지만 스웨덴은 정치권이 정파를 초월해 ‘재정개혁위원회’를 구성하며 위기에 정면 대응했다.

핵심은 ‘조기 개혁’과 ‘사회적 합의’였다. 연금제도는 소득연동형으로 전환하고, 고령화에 따라 자동으로 지급액이 조정되도록 설계했다. 복지지출은 효율화했지만 교육·보건·돌봄 등 필수복지는 유지했다. 세제는 소득세율을 낮추는 대신 부가가치세(VAT)·환경세를 확대해 재정 기반을 다변화했다.

1997년에는 세계 최초로 재정준칙(Fiscal Rule)을 법제화했다. 중앙정부가 중기(3년) 기준으로 GDP 대비 1%의 재정 흑자를 유지하도록 명시하고, 이를 위반하면 정부가 국회에 사유와 복구 계획을 의무 보고해야 했다. 정치가 단기 포퓰리즘으로 재정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스웨덴은 2000년대 들어 재정 흑자국으로 전환했고, 공공부채 비율은 80%대에서 30% 수준으로 떨어졌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스웨덴은 복지를 줄이지 않고 재정을 건전하게 만든 세계 유일의 사례”라고 평가했다. 국민들도 복지를 깎은 나라가 아니라 복지를 지켜낸 나라로 기억한다.

■프랑스, 개혁 미루다 ‘폭발’…거리로 나온 국민들

반면 프랑스는 개혁 지연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1980~1990년대 복지 경쟁 속에서 연금·공공부문 임금·사회보장제도를 확대했지만,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은 개혁을 미뤘다. 그 결과 고령화와 경기침체가 겹치며 연금 재정은 급속히 악화됐다.

2022년 기준 프랑스의 공공부채는 GDP의 110%, 재정적자는 5%를 넘어섰다. 정부는 뒤늦게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올리고, 공공부문 연금을 축소하는 개혁안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 과정이 전무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표결 없이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해 법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결과는 전국적 파업과 시위였다. 파리 도심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 정부가 국민을 배신했다고 외쳤다. 마크롱 지지율은 20%대로 급락했고, 정치 불신은 극에 달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달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하향 조정했다. 재정적자가 GDP의 5.8%, 국가채무가 113.9%에 달했기 때문이다. 피치는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한국, 스웨덴과 프랑스의 ‘중간지점’…재정준칙 실종

한국은 지금 스웨덴과 프랑스의 교차로에 서 있다. 복지 지출은 늘고 있으나 제도적 제어 장치인 재정준칙 논의는 뒷걸음질 치고 있다.

과거 한국은 스웨덴식 재정 모델을 중장기 재정 전략 모델로 채택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2016년 송언석 기재부 2차관(現 국민의힘 원내대표)은 2016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개최하며 재정전략모델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사회보험 제도가 이대로는 유지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사회보험과 지방재정까지 포괄하는 재정운용의 새 틀을 마련하기로 했다. 특히 스웨덴식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스웨덴은 강력한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중앙정부의 지출한도를 설정해 통제했기 때문이다. 또 스웨덴은 지방정부의 균형재정을 의무화하고 연금제도에서는 전국민 대상 기초연금을 폐지하는 등 복지개혁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탄핵과 함께 문재인, 윤석열, 이재명 정부가 차례로 들어섰지만 스웨덴식 재정모델 논의는 그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특히 이재명 정부에서는 적극적인 재정 투입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의 재정 개혁 논의는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복지 지출은 빠르게 늘지만 세입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가 재정을 마중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겠다고 밝혔지만 그만큼 국가채무비율이 가파르게 오르면 결국 미래 재정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재정준칙을 법제화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 두 곳뿐이다. 재정 악화 속에서도 이를 제도적으로 제어할 ‘안전장치’가 없는 셈이다. 재정준칙은 국가채무비율이나 관리재정수지 적자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하는 규범이다. OECD 38개국 중 36개국이 법제화했고 105개국이 제도적으로 운용 중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도입하지 않았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당초 2028년 50% 돌파가 예상됐으나, 이재명 정부의 확장재정 기조로 2026년에 이미 50%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기재부가 제시한 2026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중기 국가채무비율은 △2026년 51.6% △2027년 53.8% △2028년 56.2% △2029년 58%로 증가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2029년 국가채무비율을 50% 후반 수준에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의 마지노선과 상한선 자체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IMF “韓, 노령층 지출 크게 늘어난다” 우려…재정 개혁 촉구

국제기구들도 한국 정부에 제도적 재정 장치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는 구체적으로 연금제도 개편과 재정수입 조성, 지출 효율성 향상 등을 통한 재정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라훌 아난드 국제통화기금(IMF) 연례협의단 단장은 지난달 24일 “연금개편·세입 확충·지출 효율화와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재정 앵커(fiscal anchor)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정 앵커는 국가채무비율이나 재정적자 한도를 법으로 규정하는 장치를 뜻한다. 아난드 단장은 “한국은 급속한 고령화로 건강보험·연금 등 노령층 관련 지출이 중장기적으로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연금 계약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수급 구조의 균형을 맞추는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재정 개혁의 일환으로 부가가치세 감면 등 예외 사항을 정비하고, 법인세 지출(감면) 등을 검토해 전체 세입 기반을 넓힐 수 있다”며 “지출 구조조정과 같이 공공 지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재정 여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혼란은 남의 일 아니다”…마지막 기회

스웨덴은 위기 속에서 합의의 정치로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완성했지만, 프랑스는 개혁 지연 끝에 거리의 혼란을 맞았다. 한국은 두 나라의 경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합의를 통한 선제 개혁의 마지막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확장재정이 불가피하더라도 재정건전성 관리의 신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웨덴 재정개혁의 주역 앤더슨 전 재무장관은 “지속가능한 복지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정부가 국민에게, 국민이 정부에게 믿음을 갖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재정 건전성은 숫자가 아니라 미래 세대와의 약속이다. 정치권이 이를 단기 선심정책의 도구로 삼는다면 프랑스의 혼란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반대로 조기 개혁을 사회적 합의로 설계하고 모두가 조금씩 양보한다면 한국은 스웨덴 재정복지 모델처럼 복지를 지키며 재정도 지켜낼 수 있다.위기를 합의의 기회로 바꾼 스웨덴의 선택이 오늘의 한국에 가장 현실적인 해답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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