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선택 앞에 서 있다

2025-02-20

국어사전은 삼세판을 ‘더도 덜도 말고 꼭 세 판’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지만 삼세판의 심리를 오롯이 드러내지는 못한다. 우연이 작동할 가능성이 많은 단판 승부는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승자는 안도하지만 패자는 쉽게 승복하기 어렵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적 긴장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배제의 논리가 기승을 부린다. 우리 사회에 삼세판의 여백은 사라지고 사회적 낙인찍기가 만연하고 있다. 낙인찍기는 어떤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한 단정적 평가이기에 가혹하다. 낙인찍힌 사람들은 모든 삶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낀다. 그 폐쇄된 어둠은 일쑤 자기 비하 혹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배우 김새론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혹하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적 사건이다. 우리 사회를 ‘오징어 게임’의 실사판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살벌한 세상이다.

낙인을 찍는 이들은 자기가 낙인찍은 이들과의 소통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기가 만든 프레임 속에 머물 뿐이다. 그들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 옳음에 대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성찰 혹은 자기 심판이 배제된 확신은 위험하다. 자기를 의문시할 줄 모르는 이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은 창조적인 삶이 불가능한 불모지이다.

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는 세상은 복잡하고 미묘하고 모호하다. 그 다층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가 불안이다. 불안이 상수가 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이다. 불안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사는 이들도 있지만 불안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확고한 삶의 토대를 갈구한다. 사람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세상에 지친 이들일수록 연결 혹은 소속의 열망이 강하다. 바로 그런 열망이야말로 근본주의적 신앙과 정치적 과격주의의 온상이다. 사람들은 강렬한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집단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인다. 신앙적 확신의 언어로 무장하고 있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천박하고 세계관은 협소한 이들이 있다. 특정한 정보에 갇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 정신은 흐려진다. 자기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비진리로 규정하고 적대하는 옹호의 덫이 작동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이 싸우는 투기장이라고 말한다. 선과 악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자기 안의 다양한 충동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 욕망을 억제하고, 자신의 성향을 거슬러 행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소명이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은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는 살리나스 계곡에 터 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소설은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라이트모티프로 삼아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참상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침울하지만 작가는 희망의 싹을 남겨놓았다. 트래스크 가문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중국계 미국인 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너는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구절을 새롭게 해석한다. 히브리어를 연구한 그는 ‘팀셸’(timshel)이라는 단어는 ‘다스려라’라는 명령 혹은 ‘다스릴 것이다’라는 예정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선택 가능성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죄의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리는 말한다. “어쩌면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일지도 모릅니다. 선택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이니까요.”

우리는 선택 앞에 서 있다. 혐오와 분열과 배제의 말과 몸짓에 휩쓸리지 않고 어둠과 맞서 빛을 만들고, 친절함으로 세상에 봄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세상의 희망이다. 마침 우수 절기에 접어들었다. 자기 속의 얼음을 녹여 생명을 싹틔우는 이들이 더욱 그리운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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