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주식 통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 체크.
주식 투자시 수수료가 어떻게 책정되는지 정확히 설명하거나 계산할 수 있습니까? 아니오 체크.
주식 수수료 관련 약관을 직접 찾아서 읽어본 적 있습니까? 아니오 체크.
허를 찔린 기분이다. ‘EBS 당신의 문해력’ 특집에 나온 문해력 테스트를 푸는데 본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질문이 등장했다. 아니오를 연달아 체크하면서 ‘아차’ 싶기도 했고, 민망한 느낌도 들었다.
EBS 문해력 테스트에 당황
읽기 능력 저하 글로벌 현상
전문가들 소리 내 읽기 추천
느린 독서법 필사도 효과적
글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고 유추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문해력 테스트’라고 하니 정말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다. 평생 책을 가까이 해왔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또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쳐 왔는데 무슨 큰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런데 테스트를 시작하기도 전에 ‘꼭 읽어야 할 약관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당황했다.
테스트 질문도 만만치 않았다. 사실 지문 자체는 대단히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복약 설명서, 연장근로수당 계산법, 임차권 등기 전입신고, 여론조사 그래프 해석, 과자 봉지의 영양성분 비교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치는 것이었지만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답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주식 투자 수수료에 관한 지문을 읽고 수익을 계산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꽤 노력을 쏟았음에도 맞히지 못했다. 아무래도 모 대학 경영학부 교수라는 사실은 대외비로 하는 것이 좋겠다.
‘영상의 시대’라고는 하나 우리는 여전히 텍스트에 둘러싸여 있다. 일상은 물론이고 조직에서도 수많은 ‘텍스트’를 주고받는다. 문서를 읽고 의미를 파악하고, 보고서 및 발표자료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직무설명서를 습득해야 하고, 회사 아카이브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 학습해야 한다. 승진에 필요한 자격증 시험이나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학습도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다.
이렇게 중요한 문해력이지만 점차 그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최근 2030세대의 문해력이 부실하다고 지적하는 언론 기사가 자주 나오지만 사실 이 문제는 전 세대에 걸친 글로벌 현상이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디지털 의존도가 높아졌고 텍스트에 대한 집중력은 더 약해졌기 때문이다. 『도둑맞은 집중력』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 수많은 책에서도 이를 경고하고 있다.
문해력은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역량이다. 특히 직장인에게 문해력은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의 성과에 직결되는 핵심역량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3년 보고서에서 “인적 자원을 더욱 가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며 “AI 시대가 될수록 인간에게 더욱 중요해지는 핵심 기술이 문해력에 기반한 사고력”이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하면 문해력을 키울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뇌과학 연구에 기반하여 텍스트를 읽으라고 권한다. 더 효과적으로 읽으려면 글을 소리 내 읽고, 의미를 생각하며 읽고, 메모하면서 읽으라고 권한다. 또 읽기, 말하기, 쓰기, 듣기를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최근 트렌드로 떠오른 ‘필사’도 좋은 독서법이다. 필사란 글을 손글씨로 옮겨 쓰는 것인데 수십번 반복해 읽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2년 전 본격화된 필사 바람이 지난해 뚜렷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올해 들어 더욱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태그 숫자만 해도 1월 한 달에만 68만 건이었다는 교보문고의 발표도 있었다.
필사를 위한 책의 출간도 늘었다. 직장인들에게는 자기계발서, 마음을 다스리는 책이 필사 대상이 되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랫말을 필사하는가 하면 지난해 12·3 계엄 이후에는 『헌법 필사』가 많이 팔렸다. 2030세대가 주요 독자라고 하니 희망적이다. 하지만 조직의 리더를 맡고 있는 선배 세대가 더 많이 필사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필사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천천히 음미하는 아주 느린 독서법이다. 잊었던 단어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하고, 몰랐던 어휘를 깨닫기도 하는 과정이다. 아름답고, 정제되고, 지혜가 담긴 문장을 직접 손으로 쓰면서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느린 독서를 하는 사람은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가려낼 줄 알며, 비판적 사고에 기반하여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새해(우리에겐 음력이 있다!)에는 하루 10분씩이라도 필사를 시작해보자.
이은형 국민대 경영대 교수·대외협력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