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의 종말
전쟁 소리가 커지며 내게는 영국식 학교와 중국식 가정 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간격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고,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학교는 우리를 영국령 말라야에 속하는 학생으로 취급하면서 우리가 영국을 높이 쳐다보기를 바랐다. 가정에는 부모님과 친지들이 있었고 중국에 초점을 둔 관계망으로 퍼져나갔다. 두 영역 사이를 나는 꽤 쉽게 옮겨 다녔지만, 마음속에서, 그리고 언어와 행동에서 그 구분을 명확히 해야 했다.
영국에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학생들이 됭케르크 탈출작전을 보며 애국심에 불타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임을 선생님들은 알고 있었고, 나도 그것을 이해했다.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끌리는 점이라면 영국과 중국이 마침내 같은 편에 서게 되었다는 느낌일 것이다. 영국 국가가 라디오에서 더 자주 들렸고 극장에서 영화 상영 앞에 국가가 나왔다. 그에 대한 우리 느낌은 미지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 중에 전쟁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분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해 후에 알게 되었다. 영국이 약해지면 식민주의도 약해질 것이니 인도와 실론의 독립이 쉬워질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1941년에 나는 본과 5학년이었다. 소학교의 졸업반인 7학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초에 만 10세를 넘긴 나는 새로 배치된 영어와 수학 같은 과목의 전공 교사들에게 배우는 데 열심이었다. 영문법을 더 배울 것이 있었고 전보다 더 길고 의욕적인 작문을 쓰라고 했다. 시를 외우게 하기도 하고 짧고 간단한 연극에 출연을 맡길 때도 있었다. 우리 관심이 가는 주제의 짤막한 연설을 해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수학에서는 더 많은 언어 기술과 함께 사고와 계산 능력의 향상이 필요했다. 기초적인 대수학과 기하학도 배웠다. 우리는 대개 수학을 연습만 하면 되는 과목으로 생각했고 특별히 뛰어난 학생도 숫자의 신비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학생도 없었다.
지리 과목은 재미있었다. 지형과 기후, 작물과 농업, 광업과 제조업에 관한 간단한 사실들과 국가별 교역, 항구와 도시들의 위치 등을 배웠고, 나는 가끔 그 내용을 교실의 지구본 위에 맞춰볼 수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학교 정책이 수월성에 역점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건강을 잘 관리하고 운동장에서 많이 뛰도록 이끌어줄 때가 많았다. 내 가까운 친구들은 학교가 재미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마음 편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책임지는 중국인학교들은 중국의 전쟁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바빴다. 1940년까지는 학교 모임들이 해외 중국인의 애국심 논의에 집중하고 있었고, 저녁 식사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내게 분위기 변화를 알려주곤 하셨다. 역사의 이런저런 대목들에 관해, 1911년 혁명에서 화교의 역할과 쑨원(孫文)의 소망에 관해, 그리고 그 후 근대국가를 세우려는 노력에 관해 부모님이 이야기 나누시던 생각이 난다.
중국 잡지를 열심히 읽던 어머니는 전쟁의 경과와 중국 인민의 어려운 사정, 그리고 이포 여성들의 모금 운동을 알려주시곤 했다. 중국 학교에 다니던 우 선생 댁 아이들과 저우 씨 남매들을 일요일에 만날 때는 학교에서 활동과 중국 방위성금 모금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생인 형과 누나들은 같은 반 친구 중에 형이나 오빠가 중국에 가서 싸우려고 지원한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몇몇은 국민군에 입대하러 떠났는데, 그중에는 비행사가 되려고 공군에 들어간 사람도 있다는 얘기에 모두 흥분했다.
화교사회에 잘 알려진 우한(武漢)합창단이 1938년 늦게 방위성금 모금을 위해 말라야에 왔다. 싱가포르에서 시작해 중국계 인구가 많은 모든 주를 순회했다. 이듬해 초 마침내 이포에 오자 많은 지역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합창단 지도자는 상하이 방어전을 다룬 영화 〈팔백장사〉 주제가 작곡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중국인 중에 주변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다른 중국인들이 느끼는 애국의 열정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어머니는 중국인 사업가 중에 작은 방위성금조차 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이 문제를 일깨워주셨다. 아버지는 직장 분위기에 대해 평소처럼 말씀이 없으셨고, 영국인, 인도인, 말레이인 동료들 생각이 어떤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앤더슨학교의 중국인 급우 중에 우한합창단에 별 관심이 없는 집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독립왕국이라고 규정하는 곳에 살면서 영국인이나 말레이인이 관계되지 않는 일에 중국인들이 열성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편했던 모양이다. 페락, 셀랑고르, 네그리셈빌란처럼 중국인이 많이 사는 주의 말레이 군주들은 실권은 갖지 않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 대한 충성을 그렇게 공공연히 표출하는 것을 영국인 보호자들이 왜 용인하는지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중국 유행가를 배워 부르곤 했다. 이 무렵에는 애국 가요가 부르고 싶었다. 영화에서 배운 노래도 좀 있었지만, 우한(武漢)합창단의 공연을 본 후로는 중국의 전쟁과 더 직접 관계된 노래들을 부르게 되었다. 그중에는 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가 될 “의용군행진곡”도 있었다. 집을 잃고 쫓겨온 만주 피난민을 그린 “송화강 위에서(松花江上)”처럼 상실감과 영웅심을 담은 노래들도 있었다. 〈팔백장사〉의 주제가 “중국은 망할 수 없다(中國不會亡)”도 중요한 노래였다. 저녁에 어머니를 따라 새 노래들이 소개되는 음악회에 갈 때도 있었는데 거기서도 노래를 배웠다. 애국심이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지만, 우리 앞에 급속히 펼쳐지고 있던 상황에 대한 반응의 아주 작은 한 부분임을 나는 또한 알고 있었다.
우한합창단 단원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최근 졸업생이었고 상하이 출신이 많았다. 우 선생 댁에서는 단원 몇을 알게 되었고, 그 집에 갔을 때 여성 두 분을 만난 기억이 있다. 두 분은 합창단 귀국 때 따라가지 않고 남아서 페락주 학교에서 교사직을 얻었다. 전쟁이 끝난 후 둘 다 상하이로 돌아갔다. 여러 해 후 우 선생 부인이 돌아가신 뒤 그중 한 사람이 다시 왔다가 결국 우 선생과 결혼했다. 어머니와 친한 친구가 되었고 내 친구들의 계모가 된 분이기 때문에 말라야의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우한합창단을 나는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외아들인 내게 어머니는 모든 관심을 쏟았고, 아버지는 내 교육에 대해 보수적이고 신중한 태도였다. 그런데 영어 학교에 보낸 이유를 확실히 설명하신 일이 없다. 주변에는 이 결정에 반대한 친구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귀국할 뜻을 늘 분명히 하셨고, 어머니는 그 상황을 위해 나를 준비시키는 데 소홀하신 때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형제자매가 없는 까닭을 어머니께 여쭈었을 때 중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왔을 때 여행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신 일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포에서 정상적 존재가 아니고 이곳이 절대 우리 고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자라났다. 다른 중국인들은 우리보다 자리가 잡혀 보였다. 자기네 조직과 사찰이 있고 축제와 사회활동을 늘 조직했다. 그런데 우리 집은 방위성금 모금 행사 외에는 참여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 집은 유교 가문으로서 조상을 공경하는 행사만을 지킨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밖의 행사에는 구경꾼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포에 임시로 살고 있고 언제고 떠날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다.
두 가지 상충하는 생각 사이에서 때때로 고민하던 기억이 있다. 하나는 내가 이포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학교도 좋고 친구들도 좋고 그들을 떠난다는 것을 생각하기 싫었다. 또 하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생각이었다. 중국이 진짜 고향이라고 나는 믿었고, 중국의 음악과 영화를 좋아했다. 따라서 돌아갈 때를 대비해 조금이라도 더 배워두려고 열심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배우는 책에 나오는 영국의 모습에 끌리는 마음이 있었다. 아버지가 권해 주신 소년잡지의 글이나 영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에 특히 강하게 끌렸다.
열 살 때 하나의 임시 방침이 세워졌다. 아버지가 예쁜 세계지도책을 생일선물로 사주셨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본 일이 있어도 읽기 재미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책이었다. 그런데 내 책으로 가지고 한 장 한 장 지도를 들여다보며 발견의 희열에 휩싸여 세계 구석구석을 모두 살펴볼 욕구를 느꼈다. 너무나 열중하는 모습에 아버지가 놀라실 정도였다.
몇 장의 지도를 거듭거듭 들여다보면서 중요한 사항들을 목록으로 만들 욕구가 일어났다. 더 잘 기억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국가 이름에서 시작해 도시와 지방들, 섬과 바다들, 산과 계곡들, 그리고 반도와 만과 곶의 이름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자 웬만큼 알려진 장소들이 어떤 곳이 있는지, 지도상의 위치가 어디인지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하교 후 친구들과 나가 놀던 습관이 없어진 것을 어머니도 아시게 되었다. 점심 먹은 후에 나는 곧장 내 방에 들어가 지도책에 매달렸다. 따로 마련한 공책 한 권을 지명 목록으로 채웠다. 중국과 영국을 넘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포에서 먼 수많은 장소들. 역사 영화들, 특히 온 세계에 펼쳐진 대영제국과 관계된 영화들을 이 지식에 맞춰보며,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시기들을 과거에서 찾는 인생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오대륙에 펼쳐진 넓은 공간과 긴 시간 앞에서 이 세상에 대한 경이감을 키워갔다.
그 후로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지도책과 지명 목록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그렇게 하면 쾌적한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상하이든 런던이든, 넬슨이든 악비든, 어떤 장소든 사람이든 떠올릴 수 있었다. 모든 장소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내 공부를 가로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보면 내 유별난 성격을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길이 우연히 주어진 것이었다. 내가 결국은 그리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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