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선흘리 할망들 ‘레퓨지아’

2025-01-02

다른 사람들처럼 한 달 넘도록 삶이 엉망진창이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깊은 ‘빡침’, 감당하기 힘든 우울과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산란해진 마음을 수습할 수 있을까. 인류학자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다시 집어 들었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 버섯을 통해 내 감각은 되살아난다. 꽃처럼 소란스러운 색깔이나 향기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다. 버섯은 불현듯 나타나, 다행히도 내가 그곳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면 불확정성의 공포 속에서도 아직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도 그녀처럼 버려진 땅 어느 귀퉁이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송이버섯을 발견할 수 있을까.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생기 넘치게 존재하는 공간과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제주 중산간 선흘리에서 할망 11명의 그림 전시회, ‘ᄄᆞᆯ 어멍, 할망 그리고 기막힌 신들의 세계’를 만났다. ‘ᄄᆞᆯ’이었을 때 4·3을 겪어 아버지가 총 맞아 죽은 고순자 할머니는 패적낭(상처 입은 나무)의 잘린 부위에 황금 물감을 바르고 무지개를 그린다. ‘어멍’이 되자 밭을 일궈 자식들을 건사한 박경일 할머니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그림판을 밭으로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그려 넣는다. ‘할망’이 된 홍태옥은 스스로 로즈메리 여신이 되어, 총 든 4·3 군인들에게 향기를 전한다.

모든 그림이 좋았지만 특히 나는 ‘고목낭할망’, 김인자의 ‘하늘에서 내려오난’ 앞에 오래 머물렀다. 할망은 네 명의 선녀가 땅에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 기쁨으로 춤추는 모습을 생명력 가득한 초록색의 과감한 붓질로 그려냈다. 그림을 통해 꿈과 현실을 뒤섞고, 역사적 시간과 신화적 시간을 오가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해석하고 치유하며 망가진 세상을 복원하려 했다.

지난달 초 관람한 <몬스터 콜스>라는 연극도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열세 살 소년, 코너. 그는 암에 걸린 엄마, 헤어져 사는 아빠, 놀리는 친구들 때문에 밤마다 악몽을 꾼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2시7분, 자기를 부르는 나무 모양의 몬스터 소리에 잠이 깬다. 몬스터는 코너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면서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가 직접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여기서는 ‘이야기’가 치유와 구원의 매개이다. 소년은 몬스터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분노와 혼란을 이해하고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스토리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 코너를, 휠체어에 의존하는 몸,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몸, 인공와우를 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몸 등 다양한 몸을 가진 일곱 명의 출연자가 다섯 명의 수어통역사와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레퓨지아(refugia)’라는 게 있다. 원래는 빙하기에 기후변화가 다른 지역보다 적어 생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애나 칭은 이 개념을 확대하여, 손상된 지구에서 매일매일 재난을 겪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그런 레퓨지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숲의 교란 속에서도 레퓨지아가 송이버섯을 키워내고 급기야 숲을 복원시켰듯이 지구 곳곳의 크고 작은 레퓨지아가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고 세계를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제주 중산간 작은 마을, 한때 농기구를 넣어놓았던 작고 낡은 창고 미술관에서 할망들의 ‘기막힌 신들의 세계’를 만나 눈물이 날 만큼 위로받고 돌아왔다. 그곳은 ‘세계 끝의 레퓨지아’였다. 공통의 척도가 없는 낯선 몸들이 서로의 맥락을 조율하면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가는 <몬스터 콜스>를 통해 레퓨지아의 핵심은 연결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작가 한강의 말처럼 이 세계는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데 또한 아름다울 수도 있는 법이다. 조각난 마음을 주워 담고 정신을 차린다. 다시 단정하게 살고 진득하게 공부해야겠다. 그리고 이 미친 세상에서 레퓨지아도 계속 찾고 만들고 연결해야겠다. 새해가 비로소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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