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라는 이름 뒤 숨은 ‘국가폭력’…사북항쟁 다룬 다큐멘터리 <1980 사북>

2025-10-27

1980년 4월 ‘일한만큼 받고싶다’는 광부들의 항쟁

‘폭도’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국가폭력

다큐 <1980 사북>, 객관적 재조명 시도

박정희 사망 이후 정국 수습을 앞세워 전두환이 계엄령을 발동했던 1980년 4월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동원탄좌 소속 탄광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어용노조 등에 분노해 일어섰다. ‘일한 만큼 임금을 받고 인권을 존중받고 싶다’는 정당한 요구를 내세웠지만 당시 신군부의 보도통제를 받은 언론은 이들을 ‘빨갱이’ ‘폭도’로 낙인 찍었다. 당시 200여 명이 연행·고문을 당했고, 28명이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북항쟁은 야만의 시대 국가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됐다.

그럼에도 사북항쟁은 공론의 장에서 속시원하게 이야기되지 않고있다. 2008년과 2024년, 국가인권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북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피해 회복을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린 사북 주민들마저 당시의 이야기를 반기지 않는다고 한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영화 <1980 사북>은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록하자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처음 제작을 제안했던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은 지난 24일 서울 용산 CGV에서 진행한 <1980 사북> 기자간담회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사북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사북항쟁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사북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와 두 형이 광부였다. 그는 대학 동기인 박봉남 감독과 함께 당시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영화는 탄광노동자들의 처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194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탄광노동자들이 우리나라의 기간사업을 쌓아 올린 구국 영웅 같은 존재였다. 막장에서 캐올린 석탄들은 온 나라 사람들의 집을 덥히고, 공장을 가동하는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처우는 좋지 않았고, 특히 사북면에 위치한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의 환경은 더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더운물도 잘 나오지 않는 닭장 같은 사택에 살았다. 적은 임금에 삶은 팍팍했고, 물자 공급마저 회사가 쥐고 있어 식료품은 물론 연탄까지 시내보다 더 비싼 가격에 구매해야 했다. 열악한 환경 탓에 3000명이 일하는 탄광에서 매년 2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호소했지만, 사측과 더 가까웠던 노조위원장은 번번히 사측편을 들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1980년 4월 21일, 노조위원장 사퇴와 위원장 직선제 도입을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한다. 당시 현장을 채증하던 경찰이 현장에서 발각됐고, 경찰은 지프를 막아선 광부를 차로 깔아뭉갠 뒤 도망간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사북지서로 뛰어든 노동자들은 경찰을 폭행하고 집기를 부순 뒤 광산으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고 농성에 들어간다.

노동자들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여 명의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자, 광부들은 격렬히 맞섰고, 이 과정에서 이덕수 순경이 시위대의 돌멩이에 맞아 숨진다. 노조위원장을 찾지 못한 노동자들은 그의 아내를 대신 잡아들여 폭행을 가했다. 사태악화에 군이 계엄군 투입 계획을 세우자 당시 강원도지사가 중재에 나섰고, 노동자들은 3일간의 항쟁 끝에 합의된 노동 조건들을 가지고 업무에 복귀한다.

투쟁의 성과를 누린 것도 잠시, 노동 현장에 군인들이 찾아와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하나둘 체포하기 시작한다. 정선경찰서로 연행된 200여명의 노동자와 아내들은 무자비한 폭행과 물고문 등을 당했다. 여성들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몸을 짓이기는 등의 성폭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너무 많은 시민이 잡혀 온 탓에 공간 분리조차 되지 않아, 넓은 강당 속에서 누가 어떻게 쓰러져가는지 다 보였다.

군인들은 다른 광부를 불면 놓아주겠다며, 서로 비난하고 지목하게 했다. 결국 28명이 군사재판에 부쳐져 실형을 살거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마을 공동체는 붕괴됐다. 더 이들을 힘들게 한 건 ‘빨갱이’ ‘폭도’라는 낙인이었다. 영화는 당시 피해를 겪었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려준다. 80대가 넘은 피해자들의 삶은 여전히 당시의 기억에 짓눌려있었다.

박봉남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찍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긴 고민의 필요했다”고 밝혔다. 경찰관 사망이나 지부장 아내 폭행 건 등 사북항쟁의 그림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투쟁과정의 오류를 다뤄야 하고 다룰 것이라면 상세하게 다뤄야한다고 생각했다”며 “특정한 선악 구도를 만들지 않고, 이들의 공과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촬영부터 편집까지 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박 감독은 “기록 영화이기 때문에 모든 아카이브를 찾아봐야 했다”고 밝혔다. 촬영분을 편집하는 데만 2년이라는 시간이 들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잘만들 수 있을지 고민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북항쟁을 겪은 이들의 증언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화면을 보는 것 만으로도 고통스러워 편집을 한 달간 쉬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다큐를 통해 바라는 점은 단 하나, 국가로부터의 사과다. 황 소장은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딱 맞다. 부서진 광업소의 사진만이 세간에 알려지고 200여명의 사람을 집단고문 했다는 기록은 없기에 피해는 지속되고 있다”며 “영화가 국가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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