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문학] 성장과 퇴행의 딜레마, <오징어게임 2>

2025-01-10

2021년, 코로나19 시국으로 뒤숭숭할 때 사람들은 <오징어게임>을 접하곤 두 가지 익숙함에 열광했다. 첫째, 오래전의 오락들에서 기성세대는 향수를 일으켰고, 어린 세대는 신기술과 융합한 헤리티지를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둘째, 갇힌 공간에서 사투를 벌이는 영상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관객은 비자발적으로 고립된 자기의 모습을 확인했고, 이에 따라 콘텐츠에 더욱 몰입하게 됐다.

덕분에 가난하고 놀거리 없던 시절의 놀이는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K’를 붙여 대량 생산되었고, 나이 든 사람들이 어렸을 적 간식거리가 귀해서 제사 때나 돼서야 아껴 먹었던 것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새로운 먹을거리로 재탄생해 청년들의 주된 공간인 카페와 편의점에 주르르 깔리기 시작했다.

<킹덤>(2020)에서 <오징어게임>을 거쳐 <지옥>(2021)으로 이어지는 넷플릭스 주도의 영상 콘텐츠 생태계 흐름도 있었지만 그 어떤 넷플릭스 시리즈도 <오징어게임>만큼 전 세계를 뒤흔든 작품은 없다. 그리고 이 게임은 마치 황소개구리와 배스처럼 영화와 방송 생태계를 교란했다.

높은 수준의 결과물에 비해 한국의 인건비 등 제작비는 미국보다 터무니없이 낮아서 넷플릭스는 경제 논리에 따라 한국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넷플릭스의 인건비와 제작비는 한국의 영화와 방송 드라마보다 훨씬 높다.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을 거부하면서 영화만 고집하던 배우들이 넷플릭스로 향했고, 배고파서 허리가 꺾일지언정 자존심을 꺾지 않았던 영화 인력들도 넷플릭스로 몰려들었다.

현장 인력들의 FGI(Focus Group Interview)로 수행된 영화진흥위원회의 연구보고서를 보면 넷플릭스는 연출은 영화인을, 이외에는 방송 쪽 인력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품의 질은 높게, 일은 빠르게. 못돼먹은 교란과 고사(枯死) 작전이다.

넷플릭스의 일거리가 많아지다 보니 현장 스태프들도 넷플릭스로 향했다. 영화계와 방송계는 넷플릭스의 아성에 도전할 엄두를 못 내면서 영화를 찍으려면 저예산으로, 방송 드라마 자리엔 제작비가 하찮은 다큐멘터리가 들어앉았다. 아무리 넷플릭스가 초대형 어장을 만들었어도 그 안에서 살아남는 인력은 한정된다. 그래서 영화계도 방송계도 폭삭 주저앉았다. 극소수의 인력만 높은 인건비를 받으면서 대부분을 가난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산업계 허리가 끊긴 것이다.

바로 그 <오징어게임>이 두 번째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7화짜리 반쪽짜리다. 대개 방송 시리즈물은 단막극이 아니라면 한 주에 두 편씩 편성하니 홀수가 나올 수 없는데 첫 번째 시리즈의 9화와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이므로 가능한 숫자다.

이 두 번째 게임은 공간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한 발 나아간 시도지만 캐릭터의 성장이 없는 플롯, 서스펜스 규칙 오용(誤用), 모의 감옥 실험 설정의 실패, 첫 번째 게임의 성공 요인 분석 오류와 미스 캐스팅, 제작진의 거만함과 불안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

첫째, 지난 이야기가 일방적으로 내부에 모든 캐릭터를 가둔 것이라면 이번 플롯은 게임의 공간 안팎이 게임을 지속하려는 자와 중단시키려는 자로 연결성을 가진다. 극 중에서 돈을 들이붓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이 게임이 지속되길 희망하듯이 콘텐츠 소비자 또한 이 게임이 계속 진행되길 바라면서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스크린 안팎 또한 게임의 지속성으로 연결되고 있다. <스크림> (1999, 웨스 크레이븐)에서 스크린 밖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제시하며 공포를 극대화했듯 이 게임은 연속성과 지속성으로 관객을 모니터 안과 잇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수준 높은 시도가 제작자의 의도를 의심하게 할 만큼 인물, 구성, 편집 모두가 기대 이하다.

둘째, 전편에서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은 무기력한 사회적 약자에서 구질구질하고 비열하게 피를 먹고 자란 전사로 성장(?)했다. 온몸과 온머리와 무기 같지 않은 무기에서 이번에는 못 할 게 없는 456억 원으로 대한민국에서 일개인이 사실상 불가능한 무기들을 소지하고, 핑크 여관을 요새 삼아 전투를 준비한다. 그러나 그는 이 게임을 없애버리겠다고 맨몸으로 제 발로 들어가 놓고 어느 한순간도 성공하지 못한다. 너무 많아서 난잡하기까지 한 게임 규칙과 함께 일관성 없이 그저 나열되기만 한 수많은 사연의 군상들과 함께 실패를 거듭하기만 한다. 이후의 시리즈에서 성기훈이 승자가 되든 새로운 전사를 위해 그가 희생하든, 클리셰로 무장한 이 플롯의 결말은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익숙함이 소거된 채 돈과 힘 앞에 등장인물들의 무력함만 돋보일 뿐이라 보는 내내 답답하고 불편하다.

셋째, 성기훈이 마지막 번호 ‘456’번이 오메가라면 알파는 ‘001’번 오영일(이병헌 분)이다. 첫째 ‘0’을 ‘오’로, 둘째 ‘0’을 ‘영’으로 시니피앙을 흥미롭게 활용했다. 게다가 ‘알파’란 우두머리, 말하자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컷을 의미하잖은가. 굳이 기대한다면 세 번째 게임에서 새로운 알파의 등극 정도랄까. 어쨌든, 서스펜스의 양대 공식이라면, 하나는 적이나 범인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까고 가면서 관객에게 흥미로운 해법을 제시하거나, 다른 하나는 적이 누구인지 감춘 채 관객 스스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게 하는 게임의 형식이다. 두 번째 게임에서 깐부 할배 자리에 알파를 넣었다. 성기훈이 꿈에서 무의식적으로 알아챈 간첩의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이 적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만 제시할 뿐 서스펜스가 없다. 등장인물들이야 나중에 배신감이 들겠지만, 관객은 이미 느껴버렸다.

넷째, 분홍색 오징어들의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병풍 같은 소품이었던 캐릭터들이 녹색 오징어들과 연결되며 비좁은 러닝-타임에 비집고 들어온다. 이 설정은 ‘스탠퍼드 감옥 실험’처럼 입는 옷의 색이 달라지기 전에는 모두가 인간 세상의 1/N이었을 뿐인데, 분홍들은 녹색들의 생사여탈뿐만 아니라 불법 장기 매매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짓밟는 잔혹성을 발휘하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 이 게임의 정의(正義)는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성기훈은 빠르게 희생당하는 그 누구도 구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실험은 부적절한 설정이 되고 말았다.

다섯째, 매력적이지 않은 배우들을 보면 연출자가 전작의 성공 요인을 잘못 분석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든다. 첫 번째 게임은 설정과 플롯의 힘이었다. 두 번째 게임은 그저 ‘오징어게임’이면 절로 성공을 이끈다고 생각했는지 성 추문에 휩싸인 뒤 아직 용서받지 못한 두 인물을 등장시켰다. 한 인물은 게임장 안에서 끊임없이 분노 수치만 끌어올릴 뿐 매력이라고는 단 한 푼도 없는 연기를, 다른 인물은 게임장 밖에서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보는 이가 낯 뜨거워지게 하는 연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저런 인간에게 맡긴 배역이란 악역이 분명할 테고, 따라서 안에 있는 놈은 지뢰, 밖에 있는 놈은 돈다발 던지는 자들의 개(犬)일 것이란 클리셰 때문에 보는 내내 이화(異化)만 일어난다. 게다가 이정재는 성기훈의 매력을 한 치도 살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치밀한 플롯의 전개와 더 발전한 인물과 인물 간 관계를 기대한 이들에게 난데없이 등장하는 총알들의 할리우드 액션은 ‘오징어’기만 하면 돼, 라는 제작진의 거만함과 ‘더 자극적인 것’을 제대로 도출해 내지 못했다는 심연의 불안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럼에도 1을 지향하며 99는 내가 아닐 것이라는 불감증,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비민주성, 요행에 부화뇌동하는 이상한 보수성, 시체와 핏물을 밟고 뛰면서도 죽은 자들에 대한 어떤 연민이 없는 악귀와 같은 잔혹성을 잘 표현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과, 소외된 약자들이 투합해 함께 생존한다는 에피소드는 감동을 준다. 부디 세 번째 게임에서는 첫 번째보다 더한 감동과 두 번째의 실망을 만회할 수 있길.

이민정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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