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정치에 찬밥 된 반도체…꺼져가는 韓 경제[기자수첩-산업IT]

2024-12-29

탄핵 정국에도 여야 대치 지속…반도체특별법도 끝내 외면

TSMC, 엔비디아 등 반도체 기업 밤낮 안가리고 기술 경쟁력 확보

반도체법, 전력망특별법 1순위 두고 법안 통과에 뜻 모아야

계엄·탄핵 사태를 뒤집어 쓴 대한민국 열차가 폭주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부터 탄핵소추안 가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그리고 한 권한대행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불과 25일간 벌어진 일들로 국격은 추락했고 국론은 분열됐다.

핵탄두급 정치적 불확실성은 경제·금융 시장 충격으로 이어졌다. 환율 급등, 주가 폭락, 물가 상상, 소비심리 위축 등 연쇄반응이 이어지며 지난달까지만 하더라도 '파란불'이던 한국은 갑작스러운 '빨간불'에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칠 줄 모르는 여야 정쟁으로 열차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통과가 시급한 민생·경제법안이 뒷전으로 밀렸고, 한국 수출의 20%를 담당하는 반도체를 지원하는 특별법도 끝내 외면받았다.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등 재정 지원 근거를 마련하고,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을 주 52시간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같은 법안이 나오게 된 것은 반도체가 국가대항전으로 확전되면서 속도감 있는 기술 개발이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R&D 업무를 하다보면 연속성이 중요한 데, 고객사가 새로운 요구를 하거나 제품 결함이 발생하면 관련 인력이 달라붙어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을 제패한 TSMC 성공도 이 시스템을 잘 갖췄기 때문이다.

TSMC의 R&D팀은 하루 24시간, 주 7일 돌아간다. 시간을 보조금처럼 쓰며 쌓아올린 '축적의 시간' 덕에 TSMC는 애플·엔비디아 등 빅테크들이 다른 파운드리 기업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원톱' 지위를 누리고 있다. 높은 생산성→경쟁력제고→두둑한 성과라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한국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일정 시간이 되면 연구 중이던 장비 전원이 자동으로 꺼지고, 다음날 다시 세팅하느라 시간은 배로 허비된다. 이런 식이라면 기술개발 속도 경쟁이 가능할 리 없다. 한국공학한림원은 최근 발표회에서 "주 52시간제는 반도체 전쟁을 하다가 갑자기 퇴근하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그러니 R&D 인력만이라도 근무 시간 제한을 풀어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반도체 업계가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워낙 시급하다보니 삼성전자 임원들이 직접 국회를 찾아 반도체특별법 통과를 호소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전체 직원 12만5000명 중 5% 수준인 6000~7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26일 열린 국회 산자위 안건심사 소위에서 이 법안은 다른 법안에 우선순위가 밀려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양대 노총이 '반노동 악법'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거대 노조의 눈치를 보는 민주당이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 52시간제 쟁점을 두고 여야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우선순위에도 밀려 반도체법은 업계의 호소를 뒤로 한채 파묻혔다.

반도체 산업은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미국 뿐 아니라 유럽, 중국, 일본 등 정부가 나서 보조금을 쏟아붓고 인프라를 지원한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온다. 국내도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이 최근 산업단지 계획 승인을 마쳐 2026년 착공을 기대하게 됐다. 김용관 삼성전자 사장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용인 국가산업단지가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할 반도체특별법, 전력망특별법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한국이 반도체 전쟁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긴 커녕 있던 경쟁력도 잃을 것 같아 심히 우려스럽다. 건물을 지어도 송전선로, 용수 등 인프라가 부족하고 개발자들도 마음껏 경쟁하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일하거나 사업을 하겠다고 선뜻 손을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권을 앞에 두고 눈이 돌아가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여도 야도 둘 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차에 타 있다. 정쟁을 하더라도 열차가 철로를 벗어나거나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야 여야는 물론 다른 승객들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반도체법, 전력망특별법은 1순위 민생·경제법안으로 두고 통과시키는 데 뜻을 모아야 한다. 나라가 흔들려도 어떻게든 경쟁 속도를 늦추지 않겠다고 발로 뛰는 기업의 노력을 국회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일류 기업'과 '사류 정치' 공존이라는 오명을 회복하는 길은 기업의 성장판을 막지 않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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