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식 깊은 조상들의 글서 '난산의 얼' 엿보다

2025-01-14

(247) 난 향기 그윽한 선비의 고장 -성산읍 난산리의 역사문화를 찾아서

⑤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 ‘난산’

▲ 난산리에 전해지는 다양한 고문서들

(지난 호에 이어)

⑩ 중국 명시 모음집에 필사된 권학문

필자의 집안에서 간직해온 70쪽이 넘는 ‘중국 명시 모음집’은, 필자의 5대조이신 부이빈 공께서 백과사전 격인 신편옥총(新編玉叢)에서 천도문(天道門)·군도(君道)·인사(人事) 등 33개의 주제별로 명시(名詩)를 가려내 1848년 필사한 모음집이다.

여기에는 다음에 소개하는 송나라 진종(眞宗)의 권학문도 들어 있다. 송 태종의 아들인 진종(968~1022)은 아들 인종과 함께 북송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송 3대 천자(황제) 중 한 분이다.

‘부자는 좋은 밭 살 필요 없나니(富家不用買良田), 책 속에 절로 수많은 양식 생기기에(書中自有千鍾粟), 안거하고 있는 이 고당 지을 필요 없나니(安居不用架高堂), 책 속에 절로 황금색 치장된 집 있기에(書中自有黃金屋), 집문 나섬에 누군가 따르지 않음을 한하지 말라(出門莫恨無人隨), 책 속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거마가 뒤 따를 것이다(書中車馬多如簇), 아내를 취함에 좋은 중매 없다 한탄하지 말라(娶妻莫恨無良媒), 책 속에서 자연 옥 같은 얼굴 만날 것이다(書中自有顔如玉), 남아가 평생의 뜻을 이루고자 하면(男兒欲邃平生志), 육경을 부지런히 창 앞에서 읽어야 하느니(六經勤向窓前讀).’

육경(六經)은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주례(악경)을 말하나, 권학문 속 육경은 선비의 기상은 독서에서 비롯됨을 표현한 듯하다.

⑪ 김재흥의 만사목록(輓詞目錄)

만사(輓詞)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다. 제목이 ‘을묘정월일’(乙卯正月日)로 기록된 만사목록은, 앞에서 소개한 김재흥이 1915년 졸(卒)하자, 지인 11명이 보내온 만사들을 모은 목록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김재흥은 정의 좌면의 풍헌(風憲: 면책)을 지냈으며, 그가 지은 한시와 소지 등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만장과 만사 등을 부조로 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도 했다.

다음은 오용방이 보낸 만사이다.

‘하늘이 주신 공의 솔직한 품성(公之率性賦於天), 우리 마을 모든 이들 어질다 칭찬했는데(惟我鄕堂皆稱賢), 어제 밤 불현듯 세상 뜨시니(昨夜奄然世別去), 절로 흐르는 두 줄기 눈물 멈출 길 없어라(難禁雙淚自漣漣).’

다음은 김재흥이 살아생전 지은 은사(隱士)라는 한시이다.

‘연기노을에 심취해 살아가는 이내 인생(深入煙霞接此生), 인간세상 영욕엔 정을 두지 않으리(人間榮辱不關情), 베갯머리엔 수석과 숲속 샘의 합창 소리 들리고(枕邊老石林泉響), 집 밖엔 청산에 밝은 발이 떠오르네(戶外靑山羅月明), 절로 자란 심산유곡 버섯난초 좋아하고(自愛芝蘭在幽谷), 봄날 도이꽃 성안 밀려듦 싫어하는(厭看桃李拂春城), 이 늙으니 한가한 취향 누가 알아주랴(斯翁閑趣誰相和(識), 반겨주듯 외로운 흰 구름 바위 위에 걸려있네(獨有白雲岩上橫).’

⑫ 영주십경 한시 모음집

제주 출신 선비들과 제주에 우거(寓居)한 선비들이 지은 영주십경 한시들이 품제(品題)된 경관 별로 나란히 필사된 한시 모음집, 필사한 이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한시집이 난산리 출신인 김용호(전 중등교장, 김재흥 후손)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니. 22쪽 한지에 빼곡하게 기록돼 있는 한시 모음집은, 필사된 시들을 지은 문인들의 활동연대로 볼 때, 1900년대 초반에 편철된 것으로 추정된다.

난산리 역사문화지(2022)에 의하면, 행초서체로 필사된 칠언율시의 지은이로는, 제주선비인 매계 이한우·난곡 김양수·해은 김희정, 제주 우거 선비로는 율하 이용식·연파 김창현·양암 유담·영운 김계두 등이다.

오늘날에도 자랑스럽게 회자되는 영주십경은, 여기에 필사된 시를 쓴 일군의 문인들에 의해서 선정된 공동작품이라 전한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문인들의 공론에 따라 품제(品題) 되고 제영(題詠) 됨이 당시 선비들의 작시법이기도 하다.

영주십경 한시에 더해 매계 이한우 등 당대 시인들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촌거(村居)·해관(海觀)·야노(野老)·모춘즉사(暮春卽事) 등 50여 편의 한시들도 들어 있는 이 귀한 모음집을 공론화 하는 작업이 진행된다면, 제주산 한시의 지평 또한 그만큼 넓혀지리라 기대된다.

▲ 자연의 생성이치를 담은 영주십경과 매계 이한우

‘천리 밖 남쪽 물가 초가집 한 채(千里南溟一草堂), 임금님은 노인성을 보는 은혜 내리셨으니(聖恩許見壽星光), 밤마다 외로운 충정 향 사르고 앉아(孤衷夜夜焚香坐), 감격으로 흐느낄 적마다 흰 머리 느네(感泣頭邊白髮生).’

이 시는 은사인 추사 김정희에게 바치는 제자인 매계 이한우의 시이다.

추사는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이라 하고, 매계는 장수기원의 의미를 담아 스승이 머무는 집을 수성초당이라 지었다. 제주에 우거한 스승과 제주 출신인 제자가 제주의 풍광을 주제로 해 시를 교류하고 있음이다. 그리고 매계와 제자들 그리고 제주에 우거한 문인들과 영주십경을 노래하고 있음이다.

신선들이 사는 물가의 뜻인 영주(瀛洲)는 제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조천읍 신촌 출신인 매계 이한우(진)를 비롯한 일군의 시인들이 제주도 경치 중에서도 빼어난 경관들을 지역적 특색과 자연의 생성이치를 반영해 영주10경으로 선정한 것이다.

제주의 자연미를 우주의 생성이치와 함께 다음과 같이 담아낸 것이 영주10경이다.

해가 뜨고 지니(성산일출·사봉낙조), 사계절이 운행되고(영구춘화·정방하폭·귤림추색·녹담만설), 음양의 조화가 이뤄지니(영실기암·산방굴사) 사람과 동식물이 태어나더라(산포조어·고수목마). 영주10경에 녹아 있는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놀랍고 자랑스럽다. 이에 더해 영주12경으로 용연야범과 서진노성을 노래하기도 한다.

글·사진=부창순(난산리 노인회 사무국장·㈔질토래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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