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수선해 멋진 유산 물려줘야 진정한 보수

2024-12-30

한국 보수가 봐야 할 영화 ‘그랜 토리노’

이른바 보수 우익에게도 뭔가 정신이라고 할 만한 게 필요하지 않겠나.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면 정신이 필요하지 않겠나. 반공이나 시장 숭배나 권위주의 이상의 어떤 정신이 필요하지 않겠나. 진보 좌익이 경박한 패스트푸드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려면, 그 스스로 진국 같은 소울푸드가 돼야 하지 않겠나. 소울이 없는데 어떻게 소울푸드가 될 수가 있겠나. 도대체 어떻게 보수 우익의 소울, 혹은 정신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고? 보수적 영화인으로 유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그랜 토리노’부터 시작하는 건 어떤가. 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정신줄 붙잡을 수 있기를.

보수 백인 감독의 진국 같은 영화

죽음 택해 폭력 물리친 노인 그려

뜬금 계엄 사태 공동체 밥상 엎어

필사의 각오로 보수 살 길 찾아야

장례로 시작해 장례로 끝나는 영화

영화가 시작하면 디트로이트 교외 쇠락한 마을에 누군가 서 있다. 월트라는 보수 우익 백인이 서 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자, 포드 자동차에서 차를 조립했던, 인간이 지켜야 할 예의와 가치를 굳게 믿는, 그러나 인종적 편견도 가진 노인이 서 있다.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장에 서 있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이 사내는 자기 자신의 장례식장에 누워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랜 토리노’는 장례식에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남자가 자기 죽을 자리를 찾는 영화다. 죽을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인생을 정리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정리한다는 것은 유산을 남겨줄 상대를 정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월트에게도 남겨 줄 소중한 가치와 자산이 있다. 보수 우익에게 허무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보수 우익은 자신의 가치 지향에 관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소중한 것을 남겨 공동체에게 전하려는 게 보수 우익이다. 보수 우익에게 많은 경우 그것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치다. 월트 역시 자신이 믿는 미국의 가치를 후대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 가치는 그가 직접 생산라인에서 조립한 빈티지 카, 그랜 토리노라는 자동차가 상징한다.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품위 있고 아름다운 자국산 차.

멋진 빈티지 카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때 아름다운 것이 존재했음을 뜻할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줄곧 잘 간수했다는 뜻이다. 실로 월트는 유지 보수의 달인이다. 자기 집과 이웃집을 가리지 않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치고 수선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게 한다. 우리 몸에 완전한 컨디션이 없고, 우리 집에 고장 없는 날이 드물듯이, 이 세상은 늘 어딘가 낡아가고 삐걱거린다. 보수 우익은 파괴하거나 새로 짓는 사람이 아니라 쉼 없이 수선하는 사람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도 중병에 걸렸음을 월트는 깨닫는다. 자, 이 멋진 유산을 누구에게 남겨주어야 하나. 일제차를 팔고 다니는 저 차가운 아들에게? 평생 아껴온 집을 버리고 실버타운에 들어가라는 며느리에게? 할머니 시신 앞에서 욕설을 내뱉는 손자에게? 빈티지 카와 고급 가구에만 눈독을 들이는 손녀에게?

아시아의 소수민족인 몽족이 이웃으로 이사 온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자 디트로이트 주변도 가난해졌고, 진입장벽이 낮아진 그 지역에 이민자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깡패들이 설치기 시작한다. 이사 온 몽족의 내성적인 소년 타오는 깡패들의 강권으로 인해 월트의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실패한다. 타오가 예의를 갖추어 진심으로 사과하고 이웃을 돕는 따뜻한 성정을 드러내자, 월트는 타오를 용서하고 가르치고 직장을 알선하고 데이트 조언을 한다. 말투와 몸짓과 태도와 기세를 가르친다. 속죄하고 싶다면 건너편 폐가를 고쳐보라고 권한다. 이리하여 월트는 타오의 아버지이자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한 월트로 인해 타오가 자기 패거리에 들어오지 않게 되자, 깡패들은 타오를 증오한다. 한밤에 총격을 가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기어이 타오의 누나를 강간 폭행하는 데까지 이른다. 격분한 타오는 당장 총을 들고 가서 다 죽여버리겠다고 날뛴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면 타오네 가족은 끝내 이 깡패들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모른다. 타오가 날뛰면 타오 본인이 범죄자가 될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느냐고? 공권력은 늘 한발 늦다. 공권력이 출동하는 사이에 누군가 총에 맞고 폭행을 당한다. 보복이 두려운 몽족은 증언을 피하고 침묵한다. 자경단 마인드를 가진 월트 역시 공권력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보수 우익은 원래 국가의 치안력이 그렇게 확대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사건도 결국 당사자가 해결해야 한다. 월트는 날뛰는 타오를 타이른다. 침착해라. 이런 일은 내가 전문가다. 흥분해서는 안 되고, 그들의 예상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고,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

정의와 예의가 없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월트는 죽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한다. 그는 마당의 잔디를 깔끔하게 깎고,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고, 따뜻한 욕조 목욕을 하고, 새 양복을 맞추어 입고, 아끼던 개를 이웃에 맡기고, 머리를 깨끗이 다듬고, 평소보다 팁을 넉넉히 주고, 어리다고 무시했던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한다. 다른 여자와의 키스, 소소한 탈세, 그리고 자식들과 소원했던 일들을 고해한다. 그러나 평생 그를 괴롭혔던 기억은 따로 있다. 항복하려던 소년병의 얼굴을 쏘아 은성훈장을 탔던 일, 그런 더러운 일을 타오가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다. 타오를 집에 가두어두고, 홀로 깡패들의 소굴로 향한다.

전장에서 살인을 저질렀기에 평생 죄의식에 시달렸던 월트는 또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인가. 깡패들의 집 앞에서 그는 큰소리로 깡패들을 모욕한다. 야 이 ×××들아!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볼 수 있도록. 화가 난 깡패들을 바라보며 월트는 인생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고 말한다. “불 있냐.” “….” “난 있지.” 그리고 마치 총 꺼내는 척 라이터를 꺼낸다. 월트가 총을 꺼내는 줄로 착각한 깡패들은 집단으로 발포하고, 총을 맞은 월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월트는 총조차 갖고 있지 않았기에, 이 깡패들은 아주 오래도록 교도소에 갇힐 것이다. 타오네 가족은 평화를 찾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랜 토리노’는 어떤 자살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스스로 총알받이가 됨으로써 월트는 타오네 가족을 구하고 깡패들을 벌했음은 물론, 자기 자신을 벌하는 데도 성공했다. 월트 그 자신이 바로 국가 폭력의 일부였으며 그로 인해 은성무공훈장을 타기까지 했으나, 평생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강론하는 풋내기 신부에게 월트는 일갈한 적이 있다. “풋내기가 감히 노인에게 영생을 약속하다니! 신학교에서 외운 내용으로 삶과 죽음을 운운하다니! 죽음은 쓰고 구원은 달다니! 난 한국전쟁에서 17세 소년도 쳐 죽여봤고. 안고 살아야 할 끔찍한 기억이 있어. 삶과 죽음에 대해 뭘 안다고.” 그는 과거를 미화하는 보수 우익이 아니라, 과거로 인해 고통받는 보수 우익이다. 국가폭력을 용인하는 보수우익이 아니라 국가폭력으로 괴로워하는 보수 우익이다. “정말 따라다니며 괴로운 건 명령받아 한 일이 아닐세.”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벌하고, 소중한 유산만 후대에게 남겨주기로 마음먹는다.

과연 누구에게? 혈육에게? 간병인에게? 백인에게? 아니다. 다름 아닌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던 몽족 소년에게. “콩가루 가족보다 동양인과 더 통하는 게 많군.” 그는 인종적 편견을 가진 노인이었으나, 그 편견을 넘어 이민족에게 참된 우정을 발견한다. 동세대가 아닌 뒷세대의 어린 소년에게 진정한 우정을 발견한다. 품위 없는 낙서를 차에다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아름다운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물려준다. 소년 타오는 월트가 알선한 직장에서 주중에 돈을 벌고, 주말이 되면 그랜 토리노를 타고 데이트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어쩌면 결혼도 하고, 어쩌면 자식도 낳을 것이다. 월트가 겪었던 생로병사를 그 세대 나름의 방식으로 겪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도 노쇠하면 자신만의 그랜 토리노를 그다음 세대의 타오에게 물려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수 우익 월트가 생각했던 삶과 죽음이다.

한국 보수 반공 집착 넘어서야

뜬금없는 계엄시도를 통해 공동체의 밥상을 엎은 지금, 한국의 보수 우익에게도 마침내 자살의 기회가 왔다. 어떤 마무리를 할 것인가. 국가폭력의 기억을 가진 한국의 보수 우익은 과연 월트처럼, 핏줄을 넘어, 인종편견을 넘어, 구식 남성성을 넘어, 자신의 후계를 찾을 수 있을까. 반공과 시장에 대한 집착을 넘어 월트처럼 세대를 넘는 가치를 발견하고 전해줄 수 있을까.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을까. 중병에 걸린 자신을 버림으로써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까.

※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연재를 이번회로 마칩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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