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잠시 눈이 왔다. 그리고는 하늘이 곧 ‘내가 미쳤나 봐’ 하는 것처럼 금세 눈이 그쳤다. 사람도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인간의 불행은 틀린 줄 알면서도 끝까지 간다는 거다.
마음속으로도 눈이 내려 눈인지 벚꽃인지 혼란스럽던 4월의 시작, 이맘때면 어머니는 난산의 기억으로 유난히 아프시다. 상처의 기억은 참 오래 간다. 아마 마음도 그럴 것이다.
강자와 약자는 번갈아 되는 법
서로의 아픔으로 결국 같은 편
행복은 자신을 좋아하는 데서

아이가 너무 커 마취를 하면 아이가 위험하다는 말에 어머니는 목숨 걸고 동생을 낳았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어디서 점을 보니 큰 자식이 나온다네.” 우리 가족은 힘들게 세상에 나온 동생이 그 큰 인물이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는 열 한 살에 소녀 가장이 되었다. 교편을 잡던 할아버지는 마침 어딜 가신 할머니 대신 딸 셋을 먹이려고 청요리를 시켰다. 한 젓가락 뜨다가 거짓말처럼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다 소용없다. 옛날에 소 백 마리가 있었던들 지금 없으면 다 소용없다. 게다가 지금 아무리 금덩어리가 많아도 죽으면 다 소용없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단 하나의 진실이다. 일찌감치 청년 시절 성공한 나는 연말이면 그림값을 걷으러 다녔다. 복이 많아 외로움이 유일한 아픔이던 시절, 나는 그림을 판 돈으로 유학 가는 위풍당당 건방진 서른 살이었다. 평생 그림만 그리다 철들 시간이 없었던 나, 하지만 묵직한 명함을 지닌 사람들도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오랜 세월 자유인으로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그림 그리고 글 썼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제일 좋았다. 작업실이 바로 근처이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이후 아주 돌아왔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던 시간들, 원래 나는 어릴 적부터 겁이 많은 아이였다.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 길 건너는 걸 무서워하는 누나 손을 잡고 길을 건너면 어른들이 꼭 “오빠 같네” 했었다. 대학 시절 좋은데 시집가려고 선보느라 바쁘던 과 친구들을 볼 때처럼, 다들 교수 자리 따느라 정신없는 동료들을 볼 때도 남의 일 같았다. 마침 그 시절 그림이 꽤 팔리기도 해서 명함에 그저 화가라고 써넣었지만 거의 들고 다니지 않았다. 내 생각엔 내 그림이 곧 명함이었음으로.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요즘 ‘석좌교수’라고 쓰인 명함을 찍었다. 사전에는 ‘탁월한 연구 업적으로 명성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이라고 씌어있다. 참 고맙고 겸허한 마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명함을 나누어준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눈깔사탕 나눠주는 기분으로.
하지만 자유인의 명함처럼 좋은 건 없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는 것과 어른으로 사는 차이쯤일까? 유명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순간의 실수로 세상을 하직하는 모습을 본다. 이 아름다운 인생의 풍경 길을 다시는 보지 못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커피 냄새, 지천에서 피어대는 4월의 꽃향기를 다시는 맡지 못하는 거다.
오래전 46세의 나이로 투신자살한 80~90년대 전설적인 홍콩 배우 장국영의 유서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매우 괴롭다. 이에 자살한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해도 정작 당사자가 불행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잘 달리다가 철로를 벗어난 우리의 역사도 진화는커녕 계속 퇴화 중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그가 누구라 해도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더 이상 감옥에 보내지 않았으면 한다. 외국에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타국 곳곳에 퍼져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는지를. 무모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은 지혜로움, 이건 숨쉬기도 힘든 이 각박한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내기 위한 특효약이다.
나는 진짜 세상을 잘 모른다. 그러나 오늘 약자인 그대여. 강자와 약자는 번갈아 되는 법, 그게 자본주의의 매력이다. 먹을 것 걱정 없이 나약하게 자란 나와 먹을 것 걱정으로 강인하게 자란 당신이 손잡고 애틋하게 서로의 약점을 보살피며 도와주는 세상, 그곳이 천국일 거다. 날 때부터 걱정 없이 자란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쌀쌀한 세상 바람에 쓰러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지도 십 년이 되어간다. 그날 강인한 우리 어머니는 “내가 백 년 된 거북이요” 하고 태몽 꿈에 나타났다는 아들이 백 년이나 살다 왔으니 얼마나 더 살겠나 하셨다. 그 슬프고도 담담한 표정을 기억한다.
누군들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적 없겠는가? 나는 소망한다. 각기 다른 서로의 아픔으로 우리가 결국은 같은 편이길. 누가 그랬던가?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게 그렇게 어렵다.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