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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이 미국에서 통과된 후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중반, 많은 정치학자는 민주주의 체제가 전제주의나 독재로 회귀하지 않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불가역적 조건’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 자유선거제가 정착되고 특정 수준(1인당 GDP 1만5000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국가라면 민주주의는 공고화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2025년 민주주의의 모델임을 자임했던 미국과 산업화·민주화를 거쳐 정보화까지 성공한 한국, 두 나라는 나란히 민주주의 위기에 처했다.
미 정부효율부 관료제 변혁 나서
정교한 ‘디지털 관료’도 나올 듯
정부의 정보 독점 시대 저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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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위기에 더해 또 하나의 커다란 태풍에도 주목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관세와 무역 이슈 등에 가려 있으나 조만간 많은 국가가 당면할 과제인 정부개혁과 관료제 대변혁이 그것이다.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당선 직후 특집 기사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장관이 준비하고 있는 정부 대개혁을 예고했고, ‘파괴책임자(Disrupter-in-chief)’라는 표제 아래 머스크를 표지 사진으로 장식했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효율부는 백악관 직속 기구로 기능한다. 우주탐사와 테슬라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체험하면서 머스크는 국가(정부)는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인식을 굳히게 되었고, 정부의 핵심 정책 수단인 예산과 규제를 가장 먼저 손질할 것임을 예고했다. 7조 달러에 달하는 연방정부 예산 중 2조 달러를 삭감하고, 9만 쪽에 달하는 연방정부의 규제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보수 성향의 헤리티지 재단이 작성한 일명 ‘리더십의 사명(Project 2025)’에서 제안한 대로 ‘행정국가’를 해체하고, 분권화·민영화를 가로막는 연방정부 부처는 과감하게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또 딥 스테이트(기득권 관료집단)에 들어앉은 직업공무원의 임면을 대통령 재량으로 결정하는 행정명령 ‘스케줄 F’를 집행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60여년 이상 미 대외정책의 핵심 기관이었던 국제개발처(USAID)를 최근 폐쇄하기로 한 조치는 정부 개혁이 깊고 날카롭게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과 더불어 인공지능(AI)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경고를 꾸준히 보내고 있는 유발 하라리는 챗GPT 등 AI 확산에 따른 관료제의 근본적 변화에 주목한다. 사회문제와 정책의 중간 고리로 기능했던 관료의 기능을 이른 시간 내 AI가 대체한다는 것이다. 정책 수립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일정한 패턴을 포착하고, 이를 토대로 인간보다 훨씬 정교한 정책을 만들어 가는 ‘비(非)유기체 디지털 관료’의 등장을 예견한다.
하라리의 예측대로 ‘디지털 관료’ 시대가 온다면 관료제를 상징했던 전문성, 헌신성, 정치적 중립성, 신분 보장 등의 용어는 조만간 유물로서 행정학 교과서 혹은 역사서에 실릴지도 모른다.
영국 마거릿 대처와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부 당시에도 공공부문과 정부개혁은 커다란 과제였고, 이후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민간기업에서 통용되었던 효율·경쟁·성과평가가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철옹성 관료제는 근대국가 이후 처음 겪는 충격과 위기를 경험한다. 그럼에도 당시의 ‘개혁’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관료사회에 충격을 주었으되 인간을 뛰어넘는 혹은 비인간이 주체가 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시선을 2025년 대한민국으로 돌려보자.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후 정치적 시계는 한 치 앞을 예상치 못할 정도로 혼탁하다. 바깥세상에서는 국가의 사활을 건 관세·무역·기술 전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고, 그 의도가 무엇이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정부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정부와 시장, 기업과 소비자, 관료와 시민 간에 유지되었던 정보 비대칭과 정부 독점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 대한민국은 여야 정파를 뛰어넘는 국가 미래전략과 실행 조직을 서둘러 구성해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창용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리셋코리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