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인간은 여타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갓 미물이라 여기는 생쥐와 인간의 유전적 일치율은 80%에 달하고, 진화상 가장 최근에 갈라진 침팬지와의 유전적 차이는 1% 남짓이다. 그러나 나무 위의 침팬지들이 수백만년 동안 별 변화 없이 살아온 데 비해, 땅에 내려선 인류는 지형을 뒤바꿀 정도의 문명을 이루며 무려 80억이 넘는 수로 불어났다. 무엇이 침팬지와 인간을 이토록 다르게 만들었는가.
이런 의문에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답은 ‘지능’이다. 소위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커다란 두뇌를 가졌기에 주변을 관찰해 얻은 정보와 경험을 통해 습득한 기억을 바탕으로 다음을 예측할 수 있는 고차원적 의식을 갖출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매우 직관적이지만, 어딘가 미진하다. 사람보다 더 큰 뇌를 가진 동물은 얼마든지 있고, 각각의 뇌를 구성하는 뇌세포의 성분이나 특성조차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에 누군가는 사람은 동물에 비해 체중 대비 뇌의 무게가 무겁고, 뇌세포 수도 훨씬 많기에 특별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설명 역시 부족하다. 동일한 세포들을 단지 많이 모아둔다고 거기서 특별한 것이 더 생겨날 수 있을까.
이에 인간의 기원을 연구한 과학자 대니 브라워와 아지트 바르키는 인간의 고유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간만이 지닌 두뇌의 특별한 점이 아니라, 무엇이 뇌를 가진 다른 동물들이 인간처럼 고차원적 의식과 마음을 가지게 진화하는 것을 방해했는지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들이 찾아낸 그 방해 요소는 바로 ‘부정(否定)에 대한 부재(不在)’였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능력의 결여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이 고차원적 의식을 가지도록 진화하는 걸 막았다는 것이다.
얼핏 궤변처럼 보이지만, 이는 논리적 근거에 의해 도출된 주장이다. 어떤 개체라도 소위 ‘의식’이라는 걸 가지게 되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 일종의 패턴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패턴 인식이란 배가 고프면 먹이를 먹는다는 수준이 아니라, 대낮에 먹구름이 끼고 하늘이 어두워지면 비가 올 것이고 특정 나무에서는 같은 열매가 계속 열린다는 패턴을 인지하고 이를 기억하며 그에 따라 비를 피하고 나무 위치를 기억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이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의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능력을 각성하는 순간 그들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만다. 이러한 의식 수준의 개체라면 필연적으로 죽음도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죽음은 매우 빈번하기에 의식을 가진 존재라면 이를 모를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한 인지는 공포와 불안으로 이어지며 손발을 얼어붙게 하고 삶이 의지를 상실케 한다. 이는 생존과 번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어차피 죽을 거 악착같이 살아서 무얼 할 것이며, 자식은 뭐 하러 낳겠는가. 죽음의 인지는 필연적으로 멸종으로 이어지기에 대부분 동물은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죽음의 보편성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
브라워와 바르키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고차원적 의식을 가진 존재로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인류가 의식을 가지는 순간 동시에 진화한 필멸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찾는다. 여기서의 부정(denial)이란 ‘의식하게 되면 참을 수 없는 사고나 감정,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불안을 누그러뜨리려는 무의식적 방어기제’를 의미한다. 죽음을 인지하지만 이를 부정할 수 있기에, 불안과 공포에 짓눌리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본능이며 마음의 기본값이다. 문득 나 역시도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평소에는 신기할 정도로 이를 인식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부정이 본능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지금처럼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멸성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 반드시 필요했으리라는 이들의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부정에 대한 본능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죽음이라는 삶의 마지막뿐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접하는 모든 사실과 현실을 부정하는 것까지 확장되는 건 경계할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나 부정 본능은 개체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진화한 방어기제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